대변동-위기, 선택, 변화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김영사·2만4800원
‘핀란드화’(Finlandization)라는 말이 있다. 핀란드의 대외정책, 특히 옛 소련을 상대로 한 정책에 붙여진 비웃음 섞인 딱지다. 1979년 미국 <뉴욕타임스>는 핀란드화를 “전체주의적 초강대국의 군사적·정치적 무자비함에 위압되어 그 옆에 있는 작고 약한 국가가 체면을 버리고 당혹스러울 정도로 자주적인 자유를 양보하는 개탄스러운 상황”이라고 했다. 소련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대통령 선거를 연기하고, 대선 후보가 사퇴하며, 신문사가 자체 검열하는 핀란드의 모습을 서유럽이나 미국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1939년 11월26일 소련은 핀란드와 국경지대인 마이니라에서 “핀란드군이 발사한 7발의 포탄으로 13명의 소련군이 사상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 일로 양국간 위기가 고조돼 소련은 핀란드를 침공해 ‘겨울전쟁’이 벌어진다. 사건 3일 뒤인 29일 외신 기자들이 마이니라에서 소련군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코먼스
핀란드한테는 쓰라린 경험이 있다. 1939년 11월 소련의 침공을 당했을 때 어느 나라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생존과 독립은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고, 소련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핀란드를 신뢰할 때 핀란드도 안전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핀란드는 소련의 신뢰를 얻기 위해 ‘줄타기 외교’를 했다. “소련이 다시 침략할 위험이 있는데 소련의 반응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핀란드가) 어떻게 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재레드 다이아몬드(82)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지리학과 교수는 최근에 낸 <대변동>에서 이런 물음, 즉 국가의 ‘위기’ 대응을 다룬다. 문명사적 거대 담론을 펼쳤던 <총, 균, 쇠> 등 이전 저작들과는 달리 범위를 좁혀 ‘현대’ 국가들이 맞닥뜨린 위기에 어떻게 대처했고, 현재의 위기는 무엇이며 극복 가능한지를 7개국을 비교하며 고찰한다.
그의 방식은 “개인의 위기라는 렌즈를 통해 국가의 위기를 보는 것”이다. 심리 치료사들이 개인의 위기 해결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찾은 12가지를 변용해 국가 위기에 적용한다. 그것들은 ①국가가 위기에 빠졌다는 국민적 합의 ②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국가적 책임의 수용 ③울타리 세우기. 해결해야 할 문제를 규정하기 위한 조건 ④다른 국가의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지원 ⑤문제 해결 방법의 본보기로 삼을 만한 다른 국가의 사례 ⑥국가 정체성 ⑦국가의 위치에 대한 정직한 자기평가 ⑧과거에 경험한 국가 위기 ⑨국가의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 ⑩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는 국가의 능력 ⑪국가의 핵심 가치 ⑫지정학적 제약으로부터의 해방 등이다. 지은이는 “선택적 변화”를 강조한다.
외국의 공격 등 외부 요인으로 위기를 맞은 국가(핀란드와 일본), 정치적 갈등 등 내부 요인으로 위기를 맞은 국가(칠레와 인도네시아), 2차 대전 이후 점진적으로 확대된 위기를 겪은 국가(독일과 오스트레일리아)로 나눠, 위기 극복 과정을 12가지 요인에 비춰 설명한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1917년 러시아에서 독립한 핀란드는 1939년 소련의 침공을 받았을 때 ‘몰로토프 칵테일’(화염병)로 소련군 탱크에 맞서며 완강히 저항했다. 1941년 다시 소련과 전쟁을 시작했으나 1944년 배상금 등을 약속하며 평화조약을 맺었다. “핀란드는 책임의 수용과 정직하고 현실적인 자기평가에서 탁월한 모범국이었다.”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선 민주주의의 원칙을 조금은 희생할 수 있다는 “유연한 사고방식”도 보여줬다.
1853년 도쿄만에 나타난 미국의 매슈 페리 제독의 함대와 마주한 일본의 기본 전략은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최소한의 양보를 하면서 서구의 지식과 장비, 과학기술을 도입해 서구에 맞설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서려고 했다. 1868년에는 메이지유신이 있었다. 일본 육군은 독일을, 해군은 영국을 본보기로 삼았다. “메이지 시대 일본은 다른 국가들을 본보기로 활용하며 선택적 변화를 시도한 대표 사례다.” 천황 숭배, 신도 등 전통적 특징도 유지했다.
내부 요인으로 위기를 맞은 국가로는 칠레와 인도네시아가 다뤄진다. 칠레는 1973년, 인도네시아는 1965년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참혹한 인권 유린이 자행됐다. 지은이는 독재자들,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와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가 선택적 변화에 큰 영향을 줬다고 말한다. 두 나라는 이후 평화적인 정권 교체와 민주주의의 진전을 이루고 있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1970년 12월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해 1943년 발생한 유대인 봉기와 희생을 기리는 위령탑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일본과는 달리 독일이 나치의 과거를 인정함으로써 이웃 국가들과 정직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 연합뉴스
독일은 동·서독 분할, 나치 청산, 1968년 시위로 대표되는 세대간 충돌을 겪었다. 여러 국가와 국경을 맞대 지정학적 제약을 크게 받았다. 독일은 ‘나 역시 피해자’라는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국가적 책임을 받아들였다. “나치의 과거를 인정함으로써 이웃 국가인 폴란드·프랑스와 비교적 원만하고 정직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도 한국과 중국에 보여준 일본의 태도와 사뭇 달랐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정체성의 문제와 부닥쳤다. 영국을 “우리 조국”으로 여기는 것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지리적 위치와 외교·국방 전략, 경제, 인구의 변화와 충돌했고, ‘백호주의’ 폐기로 이어졌다. “다른 어떤 국가보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국가 정체성과 핵심 가치라는 문제와 관련한 쟁점에서 지금도 여전히 논쟁 중이다.”
과거를 살핀 뒤 지은이는 일본과 미국에서 현재 진행 중인 위기와 전 세계가 해결해야 할 과제를 고찰한다. 일본은 정부 부채와 여성의 역할, 낮은 출산율, 인구 감소와 고령화의 문제를 안고 있다. 과거사에 대한 진실한 반성과 사죄를 하지 않아 비롯되는 중국·한국과의 관계도 위험 요인으로 짚는다. 정치 양극화는 미국이 당면한 가장 위험한 문제다. 또 하나의 중대한 결함도 있다. 미국은 유일무이한 국가, 즉 ‘미국 예외주의’라는 “얼토당토않은 허튼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 지은이는 전 세계를 위협할 가능성으로 핵무기·기후변화·자원 고갈·불평등을 꼽는다.
<대변동>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 2016년.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위기가 닥치면 자신을 정직하게 평가하고, 지켜할 것은 지키고 바꿔야 할 것은 바꿔야 한다는 말은 너무 ‘뻔해’ 보인다. 이를 의식한 듯 지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당연한 말을 늘어놓은 거잖아. 정직하게 자신을 평가하고, 표본으로 삼을 만한 국가를 찾고, 피해 의식에 빠지지 말라는 교훈을 얻자고 굳이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책을 읽을 필요는 없어!’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 그 ‘당연한’ 조건이 과거에도 시시때때로 무시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걸핏하면 무시된다는 게 명백하기 때문에 책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강대국을 이웃하고, 군사 쿠데타 이후 오랫동안 군사독재를 겪었다. 이제는 낮은 출산율과 인구고령화에 부닥쳤으며 불평등과 정치 양극화를 우려하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사례들을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