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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프로이센의 국가 철학자가 아니었다

등록 2019-05-24 06:00수정 2019-05-24 19:37

헤겔과 그 적들-헤겔의 법철학, 프로이센을 뒤흔들다
남기호 지음/사월의책·2만원

대표적인 서양 근대 철학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헤겔(1770~1831)에게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있는데, 그가 전체주의와 왕정복고를 옹호하는 프로이센의 국가 철학자였다는 점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헤겔의 저작을 근거로 제시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법철학 개요>(1821)에 등장한 유명한 구절들이다. 국가란 “구체적인 자유의 현실”이며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요,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라는 헤겔의 말은 곧 프로이센에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런 곡해를 주도한 것은 루돌프 하임의 <헤겔과 그의 시대>(1857)였다. 하임은 저술 목적이 ‘프로이센 국가와 헤겔 이론의 친화성’을 폭로하는 것이었다고 밝힌다. 특히 카를 포퍼가 쓴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헤겔을 독일 나치즘의 인종주의와 전체주의의 사상적 선구자로까지 지목하며 이런 고정관념을 확대 재생산했다.

독일 보훔대학교에서 헤겔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남기호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가 쓴 <헤겔과 그 적들>은 이와 같은 헤겔상이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밝히는 책이다. 남 교수는 헤겔이 <법철학 개요>를 둘러싸고 개혁에 반대했던 왕정복고주의자, 민족주의자, 정치신학자 등 논적들과 벌인 대결을 재조명한다. 이를 통해 헤겔의 <법철학 개요>가 봉건 질서를 넘어서 근대 민주국가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제시하는 저서였기에 논적인 복고주의자들에게 ‘불온’한 철학이라고 공격받은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남 교수는 헤겔과 그의 논적들이 쓴 글만이 아닌 당시의 상황과 헤겔의 주변 인물들의 상황, 헤겔의 법철학 강의 필기문, 최근의 연구 성과 등을 세밀히 살핀다.

알려지지 않은 화가가 그린 헤겔의 초상.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알려지지 않은 화가가 그린 헤겔의 초상.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노년의 헤겔은 불행히도 프로이센이 왕정복고를 추진하던 시절 베를린대학 교수가 되면서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왕정복고주의자들이 정치적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선동자’들을 축출하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헤겔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친구와 제자 들이 줄줄이 체포됐다. 이런 상황에서 당대 프로이센 정치 현실에 대해 명확히 비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으나, 헤겔은 지인들의 석방을 탄원하고 탄압받은 지식인들을 돕는 일엔 빠지지 않았다. 헤겔 사후인 1840년 즉위한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4세가 “헤겔주의라는 용의 이빨을 뽑아 버려라”라고 특명을 내린 것은 헤겔 철학이 왕정복고에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프리스, 할러, 사비니, 슈바르트, 슈탈 등 다양한 당대의 논적들과 헤겔의 논쟁이 다뤄지지만, 보론 격으로 수록된 정치철학자 카를 슈미트를 다루는 마지막 장이 특히 흥미를 끈다. 남 교수는 카를 포퍼가 열린 사회의 적으로 묘사한 헤겔은 사실 슈미트에 의해 악용된 헤겔이라고 말한다. 슈미트가 자신의 독재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거로 헤겔의 국가론을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남 교수는 슈미트의 독재국가 이론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이를 헤겔의 인륜국가와 대조시켜 그 차이점을 분명히 한다. “헤겔의 인륜국가는 인간의 정치적 본질이 매개적으로 도야되고 실행되는 자유로운 실존의 무대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이 공동체적인, 다시 말해 정치적 본질은 그 공동체성을 해체하지 않는 한에서 시대마다 다양한 내용으로 채워질 수 있다. 이에 반해 슈미트에게 정치적인 것이란 그러한 포용적 공동체성이 아니라 ‘존속’의 매 ‘위기상황’마다 공동체의 정치적 통일 내지 동일성만을 경계 짓는 결단 행위로 설정되고 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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