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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절망의 땅, 삶은 마법 같았다

등록 2019-05-17 06:01수정 2019-05-20 12:21

반파시스트 의사·화가 카를로 레비
이탈리아 남부 절망의 땅에서 만난
농민들의 원초적 삶의 에너지 담아
그리스도는 에볼리에 머물렀다
카를로 레비 지음, 박희원 옮김/북인더갭·1만5800원

1935년 이탈리아 남부 한 벽촌에 북부 토리노 출신 의사가 유배됐다. 화가이기도 했다. 사르트르가 현대의 르네상스인이라는 의미로 “로마인들 중에 가장 로마인다운 존재”라 평가한 카를로 레비(1902~1975). 반파시즘 단체 ‘정의와 자유’를 세우고 반파시스트 운동을 이끌다가 당국에 의해 갈리아노(현 지명 알리아노)라는 곳으로 보내졌다. 이탈리아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표현은 부족할 것이다. 가난 속에 철저히 방치된 이곳은 레비가 쓴 이 회고록을 통해 비로소 세상에 드러났다. 현실을 지배하는 듯 보이는 문명, 국가, 이념, 종교 너머에서 작열하는, 삶의 원초적 에너지를 전 세계 독자가 발견하는 공간으로서 말이다.

카를로 레비. 북인더갭 제공
카를로 레비. 북인더갭 제공
레비는 1년 가까이 갈리아노에 머문 경험을 일기 형식으로 자유롭게 기록했다. 처음에는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 검은 눈에 검은 옷을 입은 농민들, 집집마다 걸린 검은 조기가 단체로 바래져가는 마을, “봄이 와도 산사면에는 풀 한포기 자라지 않았으며 바이올렛을 비롯한 꽃 한송이도 피어나지 않는” 어두운 풍경 속에서. 그러다 차츰 환자를 더 돌보게 된다. 말라리아와 만성적 영양실조에 허덕였지만 의사는 돌팔이뿐인 마을이었다. 교사, 군인, 사제 같은 중간계급이 남아 있었지만 농부들에겐 그냥 흡혈귀였다. 생존이 곧 사인(死因)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농부들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두 가지뿐이라고 레비는 쓴다. “침묵과 인내.” 가능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농부들에게 국가는 천국보다 먼 곳에 존재하는 재앙에 불과했다. (…) 국가에 대항하는 그들의 유일한 수단은 체념이었다. 천국에 대한 희망을 버렸을 때 허락되는 홀가분함에 비견될 만한 우울한 체념이 그들로 하여금 자연의 재앙 아래 묵묵히 굴종하며 살아가도록 한 것이다.” 책 제목은 이런 환멸을 자조적으로 담고 있다. ‘에볼리’는 북쪽에서 출발할 때 갈리아노에 이르기 전에 닿는 지역으로, 인간 또는 문명을 상징하는 ‘그리스도’는 결코 여기까지 오지 않는다는 절망이다.

카를로 레비가 유배지에서 그린 ‘루카니아 연작’.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대접하는 그들(농부들)의 태도에는 굴종이나 비겁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북인더갭 제공
카를로 레비가 유배지에서 그린 ‘루카니아 연작’.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대접하는 그들(농부들)의 태도에는 굴종이나 비겁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북인더갭 제공
이 책이 현대 이탈리아를 다룬 중요한 정치적 산문으로 꼽혀온 이유는 르네상스 유산으로부터 소외된 남부의 문제를 온전히 해당 지역의 목소리로 담았기 때문이다.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운동(리소르지멘토) 이후부터 북부와 남부의 심각한 불균형은 이탈리아 지성계의 큰 숙제였다. 레비는 리드미컬한 문장과 생애사·풍속을 수집하는 사회학의 기술로 정치적 수사에 ‘울림 페달’을 밟는다. 1967년 사르트르가 이 책의 서평에서 쓴바 “전반적인 사회를 그리지 않고, 지극히 개별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는 듯하다가 불쑥 사회의 전체적 그림을 끼워넣는다. 그렇게 해서 이야기는 추상적인 보편성으로 흐르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이런 장면. 주술과 마법에 의존했던 농민들이 병을 고치되 주술은 존중하는 레비를 더욱 따르자, 당국은 레비의 진료행위를 금지시킨다. 농민들은 반발해 탄원서를 쓴다.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레비는 그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농부들이 가장 흔하게 쓰는 표현은 ‘법대로’다. 무언가를 결정하거나 처벌하는 맥락이 아니라 ‘진짜’ ‘진정한’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자신들 모두가 서명을 한 탄원서라면 그들이 보기에는 말 그대로 제대로 ‘법대로’인 것이었고 그래서 진정한 효력을 갖는 것이었다. (…) 정부와 국가가 마땅히 갖춰야 할 모습은 바로 법의 형태로 표현된 민중의 의지에 다름 아니라는 자생적인 이해를 수반했다.”

“법으로도, 힘으로도 할 수 없다면” 농부들이 “마지막으로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예술”이었다. 의사 가운을 빌려 연극을 하거나 “소원을 비는 말들 사이에 주술을 끼워넣은, 일종의 시”로 사랑의 주문을 외운다. 레비는 마법과 주문을 후렴 구간까지 자세히 기록해뒀다. 해가 지면 집집마다 내려와준 천사들을 위해 쓰레기를 문 밖에 함부로 쓸어내지 않는다는 이들의 삶이 마법 같다. 불분명한 삶에, 이런 아름다움은 확신을 준다. 헷갈리지 않는다. 농민 자치가 곧 이탈리아 혁명이란 결론으로 나아가는 와중에, 비범하게 아름다운 문학성은 레비의 비장함을 덩달아 확신하도록 만든다.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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