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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민주와 애국’ 둘러싼 일본 전후 사상 투쟁

등록 2019-05-17 06:00수정 2019-05-17 19:53

일본 사회학자 오구마 에이지 대표작
일본 패전 이후 전후 사상 변화 추적
세대별 전쟁 체험에 따라 달라진 관점
“제 3의 전후 내셔널리즘 만들어가야”
민주와 애국-전후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공공성
오구마 에이지 지음, 조성은 옮김/돌베개·6만5000원

베이비붐 세대, 586, 밀레니얼 세대…. 한국에서 세대론은 세상을 바라보는 (부정확한) 틀이자 가장 잦은 논쟁을 일으키는 담론일 것이다.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도 양상은 비슷하다. 일본에서 세대론에 기반해 유독 치열한 사상 논쟁이 벌어진 시기가 있는데 바로 전후 시기가 그렇다.

오구마 에이지의 <민주와 애국>은 이 전후 시기에 일어난 전후 사상 논쟁을 다룬 저서다. 오구마는 게이오대학 교수(총합정책학부)이자 일본의 대표적인 비판적 사회학자로, 그동안 <일본 양심의 탄생>, <사회를 바꾸려면> 등의 저서가 국내에 출간됐지만 이번에 출간된 <민주와 애국>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오구마는 이 책의 목표를 일본 “전후 내셔널리즘과 공적인 것을 둘러싼 언설의 변동을 검증”하는 데 맞춘다. 그는 민족, 시민, 국민, 민주주의 같은 말들이 전후 시대 속에서 어떻게 배치되고 변동되었는지를 당대의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추적해나간다. 특히 오구마는 사상가들이 전쟁을 어떤 식으로 체험했는가가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관점을 견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논의는 세대론적 성격을 강하게 띤다. 그는 전쟁 시기에는 10~20년 단위로 체험하는 양상이 현저하게 달라진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가 이 방대한 저작을 저술한 동기는 전후 사상이 여러 오해 속에서 점점 보수적 내셔널리즘으로 기울어가는 모습이 두드러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민주주의와 애국을 둘러싼 전후 사상의 진면모를 밝혀야만 이로부터 계승해야 할 점과 극복해야 할 점을 구분해 앞으로의 내셔널리즘을 새롭게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봤다.

마루야마 마사오. 한겨레 자료 사진
마루야마 마사오. 한겨레 자료 사진
이 책에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의 전후 사상을 논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 기간이 바로 ‘제1의 전후’를 지나 ‘제2의 전후’가 완성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구마가 ‘제1의 전후’라고 부르는 시기는 1945년 종전 직후 10년간을 말한다. 당시 일본은 전쟁으로 인한 빈곤, 인플레이션, 기업 도산 등으로 역력한 패전국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10년 만에 급반전된다. 한국전쟁 발발로 일본이 전쟁 물자를 수출하면서 경제가 되살아나, 1955년이 되면 전쟁 이전의 모습을 회복하면서 ‘제2의 전후’에 들어선다.

‘제1의 전후’ 시기의 대표적인 진보적 사상가인 마루야마 마사오(1914~1996)는 민주와 애국을 하나로 결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전쟁 당시 신민 의식과 언론 통제를 문제 삼으며, 일본에는 자유로운 주체적 의식을 가진 개인이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국민들은 주체가 아니었기에 책임 의식도 없었고, 실권자들마저도 생각 없이 지시를 따르거나 부패하는 등 “무책임의 체계”가 지배했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사유는 ‘초극’은커녕, 실로 획득된 일조차 없다”고 말한 것은 이런 근대적 개인의 부재를 고발한 것이었다. 마루야마는 주체적인 개인들이 모여 근대적 민주주의 국가를 만드는 것이 곧 국가를 재건하는 길이라고 말해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요시모토 다카아키. 요시모토 다카아키 페이스북
요시모토 다카아키. 요시모토 다카아키 페이스북
하지만 마루야마가 연결해놓은 민주와 애국의 관계는 제2의 전후를 지나면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1960년대 들어 고도성장이 이룬 경제적 안정은 참혹한 전쟁의 기억을 흐릿하게 했다. 전후 재판으로 드러난 이전 세대의 부패와 부도덕은 일체의 권위에 대한 회의로 이어졌는데 이는 전후 사회의 권위로 간주된 마루야마 같은 지식인에 대한 반발로도 이어졌다. 전중파(2차 대전 시기에 청년 시절을 보낸 세대)인 비평가 요시모토 다카아키(1924~2012)는 죄책감이나 책임감의 근원인 공적인 것을 해체하고 사적인 것을 우선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제2의 전후’ 시대의 호응을 얻었다. 같은 세대의 보수 논객인 에토 준(1932~1999)은 전중파를 비판하면서 전쟁을 낭만화하고 “300만의 사자”라는 추상화·무해화된 전사자의 이미지를 보수 내셔널리즘의 상징으로 만들어냈다. “패전 직후에 마루야마를 비롯한 30세 가량의 전후 지식인들이 활약하기 시작했을 때, 20세 전후였던 요시모토 등의 세대는 큰 위화감을 느꼈다. 마루야마와 같은 전전파 지식인들에게는 당연한 상식이었던 마르크스주의나 헤겔 철학이, 전중파에게는 완전히 미지의 존재였다. 태어날 때부터 전쟁 상태에 놓여 있었던 그들에게는 (…) 전쟁 이외의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에토 준. 출처 위키미디어
에토 준. 출처 위키미디어
오구마는 “현재 일본의 언어 상황은 제2의 전후가 비판받고, 제1의 전후의 사상도 영향력을 잃었으며, 게다가 그것들을 넘어서는 말을 만들지 못한 상태”라며 “제3의 전후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구성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그는 자이니치 한국인과 오키나와의 내셔널리즘을 참고해 내셔널리즘을 다시 읽는 것을 하나의 방안으로 제안한다. 즉, 특정한 정부, 영토, 언어, 국적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내셔널리즘을 상상하고 확장시키자는 것이다.

한국 독자들의 관점에서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를 찾는다면, 현재의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선 전후 일본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근대 이후 사상이나 역사적 측면에서 한국에 많은 영향을 끼쳐온 일본을 제대로 아는 것은 곧 한국을 제대로 아는 것과 연결된다. 조성은 일본 메이지가쿠인대학 국제학과 전임강사는 옮긴이의 말에서 “‘제1의 전후’에서 좌파의 언어였던 ‘애국’이, 고도성장 이후의 ‘제2의 전후’에서는 우파의 언어로 바뀌어간 사실은, 한국의 해방 후 역사에서 민주와 애국이 어떻게 논의되었는지 고찰하는 데도 시사를 주리라 믿는다”고 말한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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