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음기, 영화, 타자기프리드리히 키틀러 지음, 유현주·김남시 옮김/문학과지성사·3만5000원
프리드리히 키틀러(1943~2011)는 “매체 이론의 푸코”, “디지털 시대의 데리다”로 불리며 장 보드리야르·폴 비릴리오·빌렘 플루서와 함께 동시대 매체이론을 주도한 학자다. 매체이론의 대가 마셜 매클루언이 매체를 인간 지각의 확장으로서 인간 중심적으로 본다면, 키틀러는 이를 반대로 탈인간화의 근거로 삼으며 다른 길을 걸었다. 키틀러의 반인간주의는 인문학계의 새로운 흐름인 ‘존재론적 전회’와도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다.
유럽만이 아니라 북미 등지에서 수많은 ‘키틀러리안’을 양산해온 키틀러는 국내에서도 학계를 중심으로 중요도가 높아져가고 있다. 매체이론만이 아닌 문학, 영화학, 예술비평 등에서 여러 관련 논문이 발표되고, 최근엔 키틀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연구자도 나왔다. 2015년에 키틀러의 대표작 <기록시스템 1800·1900>이 번역된 데 이어, 최근 또 다른 대표작인 <축음기, 영화, 타자기>가 국내에 출간됐다. 이 책은 키틀러의 저작 중에선 그나마 덜 어렵게 쓰여진 책으로, 그에게 유럽을 넘어서는 학문적 명성을 가져다 준 책이기도 하다.
한 매체이론가가 매체를 어떻게 정의하는지는 그의 이론 핵심과 연결되는 문제다. 키틀러는 매체를 “정보의 저장과 전달, 재현의 방식”이라고 정의하는데,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바로 ‘저장’이다. 이 때문에 언어부터 매체로 보는 여러 다른 매체이론가들과 달리 그는 언어를 매체로 보지 않고, 문자부터를 매체라고 본다. 언어는 문자 없이는 저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키틀러는 ‘소위 인간’(그는 인간을 실체 없는 믿음의 총체라고 본다)이 문자를 발명한 이후부터 모든 것을 문자라는 좁은 기표로 변형시켜 저장해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20세기 초반 축음기, 영화, 타자기라는 세 가지 새로운 아날로그 기술 매체가 등장하면서 문자 매체의 독점이 끝났다. ‘기록체계 1800’이 지나가고 ‘기록체계 1900’이 시작된 것이다. 이 새로운 세 프로토콜이 인간의 지각을 어떻게 바꾸고 종속시켰는지를 다루는 것이 바로 <축음기, 영화, 타자기>의 내용이다.
축음기는 기술 매체 시대의 첫 번째 주자였다. 이전엔 소리를 저장하는 방법은 문자로 바꾸는 방법밖엔 없었다. 예를 들어, 수많은 개의 각각 다른 짖는 소리도 차이가 삭제된 채로 ‘멍멍’이란 단순한 문자로 저장됐다. 하지만 축음기는 우리의 뇌와 귀로 걸러 듣던 소리, 소음, 잡음을 동일한 가치로 녹음하고 재생했다. 봉인되어왔던 청각 정보라는 거대한 무의식의 대륙이 인류의 역사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이는 현대인의 지각 체계를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표적인 영향이 정신분석이었다. 축음기는 환자의 잡담과 말실수에 주목하게 만들어줬고, 이는 무의식의 문을 여는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뒤이어 등장한 영화의 양상은 사뭇 달랐다. 실재의 시각적 정보의 양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저장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스틸컷을 1초에 24번 빠르게 돌려 착시를 일으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영화의 본질은 처음부터 “조작”이었던 것이다. 라캉의 구분법을 따르면, 영화는 실재적인 것(실재계)을 상상적인 것(상상계)으로 대체했다. 그동안 사람들이 소설을 읽으며 장면을 상상하던 세계는 20세기 이후 편집된 영상들로 대체됐다.
1888년 10월14일부터 1889년 3월31일까지 에펠탑. 문학과지성사 제공
타자기는 단순히 문자(상징계)를 문자로 옮기는 행위처럼 보인다. 하지만 타자기의 발명은 저자라는 신화를 해체하는 효과를 낳았다. 저자가 손으로 직접 글을 쓰는 연속적인 행위는, 구술하는 (남성) 저자-받아쓰는 (여성) 타이피스트-기계 타자기로 분절됐다. 이런 분절은 언어가 임의적인 기호의 조합과 배열에 다름없음을 알려줬고, 오랜 기간 인간이 글에 부여해온 심오한 정신성이란 가상을 붕괴시켰다.
앞의 세 아날로그 매체의 근본적인 한계는 서로 호환이 잘 안 된다는 점에 있었다. 하지만 컴퓨터란 디지털 매체가 나타나면서 그런 장벽마저 사라졌다. 이제 모든 매체가 컴퓨터로 종합된다. 매체의 역사가 종말을 맞은 것이다. 아날로그 기술 매체에서 시작된 정보의 조작도 디지털 매체에선 그 봉합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말끔히 수행되면서, 인간과 매체와의 관계도 인간을 배제하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키틀러가 “역사라는 이름의 영화를 되감는다면, 그것은 끝없는 순환 루프임이 밝혀질 것이다. 문자의 독점과 더불어 시작된 것은 비트와 광섬유 케이블의 독점과 더불어 끝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 맥락이다.
<축음기, 영화, 타자기>를 김남시 이화여대 교수와 함께 번역한 유현주 연세대 교수(독문과)는 1990년대 후반 독일 훔볼트대학에서 오랜 기간 직접 키틀러의 강의를 들은 키틀러의 제자다. 8일 연세대에서 만난 유 교수는 “요즘 ‘사용자 친화성’이란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이 말은 컴퓨터가 사용자를 유아화시키는 현실을 보여준다. 소수만이 기술을 독점하고, 일반 사용자는 컴퓨터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혀 알 수 없고 본질에 접근할 수도 없다. 마치 중세에 교회가 라틴어 성서를 번역하지 못하도록 해놓고 성화로만 교리를 설명하는 식의 ‘친절함’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유 교수는 이어 “국내 인문학계에선 매체를 투명한 도구로 생각한다. 어떤 학술대회를 가도 ‘어떤 새 매체가 나와도 주체적으로 잘 사용하면 된다’는 식으로 모든 논의가 끝난다. 하지만 인간의 지각이 매체의 종속 변수고, 인간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키틀러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태도는 매우 소박한 것이다. 키틀러의 이론이 디스토피아적이기는 하지만 매체의 이런 속성을 알고 접근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를 낳는다”고 말했다.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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