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론폴 프라이 지음, 정영목 옮김/문학동네·2만2000원
지난달 정부가 마련한 인문사회과학 활성화 방안을 두고 벌어진 토론회에서 한 행정학자가 인문사회과학 위기의 원인을 두고 이렇게 물었다. “새로운 기술·사회 변화에 따른 도전적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과연 인문사회과학 커리큘럼은 지난 10년 동안 얼마나 변화해왔는가.”
이런 날 선 추궁에 대한 답 대신 이 책을 살며시 내밀어 본다면 어떨까. 40년 동안 같은 제목으로 진행되어온 한 강의를 담은 이 책을 말이다. <문학이론>은 폴 프라이 미국 예일대 명예교수가 ‘오픈 예일 코스’의 일환으로 2009년 봄학기에 진행한 26개의 문학이론 강의를 담은 책이다. 1970년 말에 시작한 이 강의는 무려 40년가량을 이어온 유서 깊은 강좌다.
폴 프라이 미국 예일대 영문학과 명예교수는 40년가량 문학이론 입문 강좌를 진행해왔다. 출처 예일대 누리집
그는 강의 초창기에 문학이론 입문을 가르치는 것은 어색한 일이었다고 회상한다. “많은 사람이 이론의 ‘입문’은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했죠. (…) 너는 페미니스트다, 또는 마르크스주의자다, 또는 폴 드 만의 제자다, 따라서 만일 개관 같은 것을 가르치려 한다면 근본적인 신념에서 출발하고, 그것으로부터 나머지를 끌어내야 한다. 이것이 당시 이론을 가르친다는 것에 대한 느낌이었습니다.” 당시에 예일대 다른 강의실에선 폴 드 만이 자신이 실행에 옮기고 있던 해석의 기술을 가르치고 있었다는 회상도 흥미롭다.
이 책은 강의를 녹음해 거의 그대로 옮겼음에도 논리 전개가 탄탄하다. 그가 매번 달랑 한쪽짜리 메모만 가지고 강의에 나섰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 정도다. 책을 읽으면서도 이 강의를 위해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방대한 참고문헌의 무게가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이들의 철학과 문학이론 개념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하지만, 독서의 흐름이 끊기지는 않는다. 칸트든, 데리다든, 가다머든 어떤 난해한 사상이라도 손쉽게 핵심을 포착해내고 그들 사이의 차이를 명확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프라이는 20세기 문학이론의 핵심을 “회의주의”라고 말한다. 그는 그 이유로 ‘근대성’ 자체에 회의주의가 내재해 있기 때문이라고 지목한다. 이미 데카르트부터 아는 것과 그것을 아는 방식 사이의 관계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여, 자신이 존재한다는 근거를 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묻기 시작했다는 것. 특히 현대문학이론은 폴 리쾨르가 ‘의심의 대가’라고 호명한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를 선구자로 삼으면서 본격적으로 ‘의심의 해석학’의 길로 접어들었다.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니체의 언어,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욕망으로 인해 인간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아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됐다.
폴 프라이 미국 예일대 영문학과 교수는 “이제 인문학 공격의 주요한 주제는 그 부정성이 아니라 무용성”이라고 말한다. 출처 예일대학교 누리집
리쾨르가 ‘의심의 만신전’에선 빼놓았지만, 프라이는 21세기 문학이론의 양상을 바꿔놓을 가장 중요한 인물로 찰스 다윈을 든다. 다윈은 의식을 사회생물학, 인지과학 등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보는 사고방식을 확립했고, 이런 사고는 “21세기 들어 점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프라이는 말한다.
해석학, 신비평, 러시아형식주의, 해체주의,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등 문학이론 전반을 다루는 이 책은 앞으로 빼놓을 수 없는 문학이론의 교과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영목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가 강의의 말맛을 잘 살려 번역했다.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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