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16세기 ‘아날로그 페이스북’ 있었다

등록 2019-05-03 06:00수정 2019-05-09 18:56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
표정훈 지음/한겨레출판·1만5800원

더 나은 질문을 위해 고민하지 않는 이와 더 나은 답을 만들어가긴 어렵다. 질문의 자리에 상상을, 답의 자리에 현실을 두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출판평론가이자 번역가 표정훈의 오랜 취미가, 상상이다. “그림에 숨겨진 이야기를 상상하기, 이야기에서 그림을 상상하기”. 동서양 철학·역사·문학을 가로지르며 “상상의 행복과 행복의 상상은 같다고 믿는다”.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은, 책이 그려져 있는 회화 38편을 통해 텍스트와 그림의 문화사를 써내려간다. 그림 속 책은 특정되기도 하고, 당대 출판문화에 견주어 추정되기도 한다. 인물 간 대화를 그려보거나, 그림 속 상황을 드라마처럼 각색도 한다. 이렇게 유연한 상상을 팽팽하게 촉진하는 건 풍부한 인문지식이다.

“세상과 삶은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나는 눈을 크게 뜬다. 그리고 바라본다.” 소포니스바 앙귀솔라 <자화상>(1554) 한겨레출판 제공
“세상과 삶은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나는 눈을 크게 뜬다. 그리고 바라본다.” 소포니스바 앙귀솔라 <자화상>(1554) 한겨레출판 제공
이탈리아 화가 소포니스바 앙귀솔라의 <자화상>(그림)을 보자. 20대 초반이던 1554년 작품이다. 티 없이 당찬 눈빛이 하도 강렬해서 늦게 발견하기 쉽지만, 앙귀솔라는 가슴 앞에 작은 책을 보란 듯 펼쳐놓고 있다. 적힌 문장은 이렇다. ‘혼인하지 않은 처녀 자신이 그린 소포니스바 앙귀솔라 1554’. 남성에게 속하지 않은 독립적인 존재라는 “인간 선언”.

그렇다면 저 책은 메모장인가? “수첩 용도로 내용이 빈 책을 만든 시대는 아니었다. 다만 ‘친구들의 책’으로 옮길 수 있는 리베르 아미코룸(liber amicorum)이 있기는 했다. 지인들이 돌려가며 백지에 메시지나 그림을 적어 넣고 돌려보던 책. 르네상스 시대의 아날로그 페이스북”인 셈이다. 당시는 오늘날의 판형과 비슷한 책이 막 퍼져가던 때다. 이전까지는 대부분 도감 수준의 판형과 비슷하거나 더 컸다고 한다. “이동 중에(mobile)도 읽을 수 있게 된 독서환경 변화” 덕분에 앙귀솔라는 저런 책을 쥘 수 있었다.

소설을 통해 시대를 읽었던 독서광 고흐가 말한다. “우리는 읽을 줄 알잖아. 그러니까 읽어야지.” 빈센트 반 고흐 <석고상, 장미꽃, 소설 두 권이 있는 정물>(1887)
소설을 통해 시대를 읽었던 독서광 고흐가 말한다. “우리는 읽을 줄 알잖아. 그러니까 읽어야지.” 빈센트 반 고흐 <석고상, 장미꽃, 소설 두 권이 있는 정물>(1887)
독서광 빈센트 반 고흐는 여러 작품에 책 표지를 그려두었다. <석고상, 장미꽃, 소설 두 권이 있는 정물>(1887)에는 비너스상으로 보이는 미의 여신 옆에, 공쿠르 형제의 <제르미니 라세르퇴>와 모파상의 <벨아미>가 그려져 있다. “‘미’라는 닿을 수 없는 이념 밑에 자리한 (…) 비루하지만 살아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주는 두 소설과 고흐의 삶이 감미롭게 뒤엉킨다.

“보통 사람이 추구하기 힘든 길, 철학자의 고독한 길이다. (…) 그림 속 스피노자가 걷는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 설 것인가? 자꾸만 뭇 사람들 사이에 서고 싶어진다.” 사무엘 히르첸벨프크 <파문당한 스피노자>(1907)
“보통 사람이 추구하기 힘든 길, 철학자의 고독한 길이다. (…) 그림 속 스피노자가 걷는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 설 것인가? 자꾸만 뭇 사람들 사이에 서고 싶어진다.” 사무엘 히르첸벨프크 <파문당한 스피노자>(1907)
“독서 가운데 뜻밖에 보람과 유익이 큰 독서는 바로 ‘표지 독서’”라는데. 이 책, 자꾸 만지고 싶게 생겼다. 둥글린 모서리, 스웨이드 가죽처럼 부드러워 미끄러지는 듯한 표지 질감은 독자와 본능적인 연결감을 이룬다.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그림 한겨레출판 제공

“정신의 날을 벼리는 것만이 독서의 효용이나 목적이 아니다. 마음의 결을 한가로이 고르는 것 역시, 아니 그것이야말로 독서의 진정한 기쁨일 수 있다.” 윤덕희 <독서하는 여인>(18세기)
“정신의 날을 벼리는 것만이 독서의 효용이나 목적이 아니다. 마음의 결을 한가로이 고르는 것 역시, 아니 그것이야말로 독서의 진정한 기쁨일 수 있다.” 윤덕희 <독서하는 여인>(18세기)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소방관’ 곽경택 감독 호소 “동생의 투표 불참, 나도 실망했다” 1.

‘소방관’ 곽경택 감독 호소 “동생의 투표 불참, 나도 실망했다”

신라왕실 연못서 나온 백자에 한글 ‘졔쥬’ ‘산디’…무슨 뜻 2.

신라왕실 연못서 나온 백자에 한글 ‘졔쥬’ ‘산디’…무슨 뜻

이승환, 13일 윤석열 탄핵 집회 무대 선다…“개런티 필요 없다” 3.

이승환, 13일 윤석열 탄핵 집회 무대 선다…“개런티 필요 없다”

탄핵 힘 보태는 스타들…“정치 얘기 어때서? 나도 시민” 소신 발언 4.

탄핵 힘 보태는 스타들…“정치 얘기 어때서? 나도 시민” 소신 발언

환갑의 데미 무어, 젊음과 아름다움을 폭력적으로 갈망하다 5.

환갑의 데미 무어, 젊음과 아름다움을 폭력적으로 갈망하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