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와 조선의 틈새에서-조선인의 ‘가시화/불가시화’를 둘러싼 역사와 담론오세종 지음, 손지연 옮김/소명출판·1만9000원
‘식민지의 역사 속에서, 오키나와전쟁 속에서, 그리고 미군 통치하에서 불가시화되고, 때에 따라서는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으나 그마저도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 ‘미국, 일본, 한국, 그리고 오키나와의 틈새에 끼이게 된 존재.’
재일조선인 3세로 <오키나와와 조선의 틈새에서>를 쓴 오세종(45) 류큐대학 인문사회학부 준교수는 오키나와의 조선인을 이렇게 묘사한다. 대부분 일제 때 끌려가 ‘소와 말’ 취급을 당하며 ‘군부’로 불린 남성들과 ‘위안부’로 불린 여성들이다. 지은이는 부족한 자료의 틈새를 오키나와현사와 시정촌사, 신문자료 등으로 메우며 오키나와전쟁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키나와의 조선인을 고찰한다. 그는 “오키나와 조선인들이 어떻게 불가시화되고, 그리고 그/그녀들이 어떻게 오키나와인들과 함께 가시화되기에 이르렀는지를 추적해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말한다.
1944~1945년 주로 경상북도에서 1만~1만5천명의 조선인이 오키나와에 끌려왔다. 어림잡은 수치다. 1944년 10월10일 미군의 대공습 이후에는 조선인 여성들도 끌려왔다. 오키나와에는 140여 곳의 ‘위안소’가 있었다.
구중회씨 일가. 구씨의 아내 우타(오른쪽부터), 유아, 둘째아들 쓰구오, 둘째딸 야에코. 소명출판 제공
지은이는 ‘일본이 항복하고 5일 뒤’인 1945년 8월20일 발생한 구중회씨 가족 학살 사건이 “오키나와 내 식민지주의 질서를 선명하게 보여준다”고 말한다. ‘다니카와 노보루’라는 이름으로 살던 구씨와 오키나와인 아내, 그리고 5명의 어린 자녀들이 ‘스파이’ 혐의로 일본군에 참혹하게 몰살당했다. 섬 주민들이 구씨를 스파이로 지목했다. “밀고행위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식민지주의 질서 즉 조선인을 자신들보다 하위에 자리매김하고, 더 나아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구조에 주민들도 포획되어 있다는 점이다.” 제국(본토)의 억압과 차별을 받던 오키나와도 위계질서의 일부였다.
일본의 항복 이후 조선인들이 많이 수용됐던 야카 수용소 모습. 소명출판 제공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조선인 대부분은 귀향했지만 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그후 어떻게 됐는지 알려진 게 거의 없다. “그/그녀들의 존재가 보이지 않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조선인들 스스로 차별을 두려워해 오키나와식 이름을 사용하는 등 출신을 숨겼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오키나와 조선인이 법적으로 ‘조선인’에서 ‘류큐주민’으로, 그리고 ‘류큐주민’에서 ‘무국적자’로 규정돼 가는 과정에서 보이지 않게 됐다.” 이들은 땅을 소유하지도 혼인 신고도 하지 못했다. 지은이는 오키나와를 통치한 ‘류큐열도 미국 민정부’ 등의 포고와 포령을 통해 조선인이 무국적자로 전락한 과정을 살핀다.
이렇게 “증발”된 조선인의 존재가 보이게 된 건 오키나와 주민들의 반미·반전 운동과 관련이 깊다. 미군 통치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띠기도 한 ‘복귀운동’(1972년 오키나와는 미국 통치에서 벗어나 일본으로 ‘복귀’한다)은 “조선인을 가시화하는 토양”이 됐다. 오키나와의 미군기지가 베트남전에 깊이 개입함에 따라 피해자로서만 자신을 인식하던 오키나와는 자신의 가해성을 성찰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키나와 내부의 아시아로 시선을 돌리는 일은 없었다.”
오키나와 조선인은 1960년대 중반 한국 매체를 통해 알려진다. 구중회씨 가족 사건도 보도됐다. 무엇보다 지은이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전쟁체험 증언을 대대적으로 수집하려고 했던 ‘기록운동’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군과 병사들의 시각이 아닌 민중의 시각으로 오키나와전쟁을 재구성하려는 것이었다. 주민들의 증언에 조선인이 등장했다. “조선인들의 존재는 가해의 위치에 서게 되는 문제를 베트남전쟁에 한정하지 않고, 좀 더 넓은 시야에서 비판적으로 사고하게 하는 동력이 된다.”
1970년 7월 미국인 선교사를 인질로 삼아 도쿄타워전망대를 점거한 사건도 주요하게 다뤄진다. 사건을 일으킨 도미무라 준이치는 오키나와 출신이고, 구중회씨도 알았다. 그는 전망대에 있던 조선인들은 풀어줬다. “몇십 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일본인과 일본 정부는 조선인에게 수많은 고문과 학살을 자행해 왔고, 그런 면에서 조선인은 우리 오키나와와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도미무라)
오키나와 본섬 요미탄촌에 2006년 세워진 ‘한의 비’는 ‘군부’와 ‘위안부’의 존재를 명확히 밝히고 반전평화를 염원한다. 오세종, 소명출판 제공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복귀’한 이후 총련의 주도로 오키나와전쟁 당시의 조선인들에 대한 조사가 이뤄진다. “이 조사를 계기로 조선인들도 타자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입을 통해서 말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이때도 배봉기(1914~1991) 할머니는 드러나지 않았다. 1975년 10월 특별재류자격 신청을 한 할머니의 개인사가 일본 언론들에 보도됐다. 한반도 출신 여성 가운데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임을 처음으로 세상에 밝힌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오키나와전쟁에서 최하층에 자리한 여성 배봉기가 기록운동이 시작된 담론공간에 증언이 아닌, 지금 살아있는 존재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키나와의 조선인이 입었던 식민지지배의 폭력과 일본, 미국, 한국으로부터의 국가폭력의 존재를 명확하게 폭로하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오키나와의 식민지주의의 과거와 현재가 배봉기라는 존재를 통해 그대로 드러난 것이기도 했다.”
미야코섬에 자리한 ‘아리랑 비’와 그 뒤편에 자리한 ‘여자들에게’. 오세종, 소명출판 제공
지은이는 오키나와에 있는 조선인에 관한 비와 탑 10기를 소개하며 어떻게 서로 다르게 조선인을 기억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곳엔 기억을 과거에 닫아두려는 사람들과 기억을 미래로 열어가려는 사람들의 ‘기억 투쟁’이 새겨져 있다. 책은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발간됐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