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낭독회 겸 북토크 현장]
봄인데, 세찬 비바람이 몰아쳤다. 창밖에는 아직 지지 말아야 할 벚꽃잎이 흩날렸다. 사람들은 꽃샘추위에 몸서리를 치고 우산에 묻은 빗방울을 털며 책방으로 하나 둘 들어왔다.
지난 9일 저녁 7시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역사책방에서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창비) 낭독회 겸 북토크를 열었다. 세월호 참사 5주년 추념전 <바다는 가라앉지 않는다>와 연계한 이 행사는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과 창비가 함께 주최했다. 50명을 참가 사전 신청을 받았지만 70여명이 참석해 자리가 꽉 차 앉을 공간이 부족할 정도였다. 지난 2014년 여름부터 글로써 참사의 증거를 남기고 고통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들고 있는 ‘기록단’의 5명 작가가 이날의 ‘호스트’였다.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미류가 사회를 맡고, 인권연구소 ‘창’ 유해정 연구활동가와 이호연 인권기록활동가, 홍은전 인권기록활동가, 박희정 인권기록활동가도 장내 정리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9일 저녁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낭독회 겸 북토크를 연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역사책방. 416재단 제공
이날 행사에는 세월호 참사 희생학생 문지성 어머니인 안명미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숨진 하청업체 노동자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이야기 손님으로 자리를 함께했다. 그밖에도 박래군 416연대 공동대표(인권중심사람 소장)와 은유 작가가 유가족의 육성을 모은 책의 일부를 낭독했다.
# 우리 아이는 갔는데 왜 쟤네는 살고 있나
-사회자 미류: 이번에 발간된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창비) 1장이 ‘고통의 단어사전’이다. 우리는 재난참사 피해자들의 고통을 많이 듣는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듣는 게 별로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신 어때요?”라고 묻지 않고 ‘고통스럽겠지’ 하고 짐작하고 말았기 때문 아닐까. 오늘 오신 분들이 각자의 단어장을 만든다면?
-안명미(문지성 어머니): 참사 그날을 표현한다면 저는 ‘어이가 없네’라고 하고 싶다. 달리 그날을 표현할 단어가 없다. 그 이후로는 봄이, 그렇게 좋아했던 봄이 싫더라. 저 나무는 왜 또 새싹이 나나, 꽃을 피우나…. 우리 아이는 갔는데 왜 쟤네들은 계속 살고 있을까. 엄마들이 벚꽃나무 꽃을 다 쥐어뜯고 싶다 그랬다. 아이 찾으러 갈 때 벚꽃 봉우리가 맺혀있었는데 아이를 15일 만에 찾아와 장례치르고 보니 꽃 다 지고 새싹이 나더라. 그해 봄은 어떻게 가버렸는지 기억에 없다.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봄이 돌아오면 그렇게 미웠다.
-김미숙(김용균 어머니): 이전 생활이랑 지금은 딴 세상이다. 이 일을 겪으며 절망하고 분노했고, 희망이 없구나, 이 안전하지 않은 사회에 희망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했다. 내가 살아서 뭘 해야 될까,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살리려면, 한 사람이라도 살리려면 그게 나한테 희망이 되지 않을까, 다른 이유가 없고 그것을 붙들고 살고 싶다. 그게 아니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웃고 살고 싶지도 않고, 행복해지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살아야 한다. 살게 된다면 사람 살리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고 싶다. 예전에 느꼈던 봄의 싱그러움을 느낄 수 없다. 옛날에는 꽃을 예쁘게 보고 좋구나,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예쁘게 보이지 않고 살려고 밥 먹고 자는 것, 사는 것 자체가 아들에게 미안한 일이 됐다. 그렇지만 나는 살 것이다. 살아서 우리 아들 그렇게 만든 사람들, 죄지은 사람들 벌 받게 해야 되지 않나. 괴롭힌 사람들, 죽게 만든 사람들 다 벌받게 만드는 게 당연한 거지 않나.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여러분도 제 손 놓지 말고 함께 해달라.
세월호 참사 희생학생 문지성 어머니인 안명미씨(왼쪽)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숨진 하청업체 노동자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 416재단 제공
# 엄마는 한 아이만 안고 있었어
-사회자 미류: 당사자만이 겪는 사건의 시간이 있다. 저희가 쓴 책 2장에 그런 이야기를 담았다.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르는 순간의 기억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나 .
-김미숙: 책이 발간 되자마자 받아서 한 장 한 장 보다 울다 했다. 다 제 얘기같아서 힘이 들었다. 지금 와계신 젊은 분들 모두가 아들 동료들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나나 내 가족이 겪을 수 있는 일이다. 한 사람이 당하면 그 가족은 다 깨진다. 그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아픔을 남이 겪는 게 아니고 내가 겪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으로 유가족을 대해주기 바란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 그만 잊어도 되지 않느냐’고 하고, 가족 중에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로 생각해주는 것이라면 손만 잡아줘도 느낀다. 힘들어보이면 안아주고.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안전하지 않은 사회. 그거 바꾸려고 모인 사람들이지 않나. 그런 의미로 모인 분들이라 생각하면 정말 고맙다.
-안명미: 세월호 5주기가 다가온다. 국회에서 금식을 할 땐 아이를 잃었기 때문에 마음 속에 죄책감이 많이 들었다. 아이를 잃고 보니 스스로 죄인같은 느낌이 들었다.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애를 잃었니?’ 누구도 그 말 안했지만 스스로 그렇게 느꼈다. 기도원에서도 단식을 하고 왔는데 15일 금식에도 또 참석했다. 그런데 하겠더라. 아마 엄마이기 때문에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우울증이 왔다. 2014년도에는 너무 우울해서 자다가도 일어나고… 가정이 뒤집어져버렸다. 저녁에 일곱 식구가 둘러 앉아 밥먹는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그날 이후 그런 것이 없어져버렸다. 모두 다 상처를 받은 거다. 아이들도 엄마 아빠가 돌아다니니까 맘을 못 잡았다. 당시엔 내 가슴에 지성이 하나밖에 안 들어왔다. 다른 아이가 있음에도 그 아이 하나밖에 안 들어있어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더라. 아이들도 그걸 느꼈다고 하더라. “엄마, 한참을 엄마는 지성이만 안고 있었어.”
사람들 앞에 나서질 못했다. 세상엔 ‘세월호’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나. 그 속에 들어가기가 너무 싫은 거다. 죽을 거 같이 힘들어도 내가 세상 속에 들어가야지, 생각하지만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사람들의 말도 나와 너무 다르고…. 나는 너무 놀라운 것을 봤다. 생생하게, 놀라운 것을 봤고, 너무 크게 내 가슴 안에 있다. 그 분들께 죄송하지만 사사로운 것을 얘기할 때 내 귀에는 이제 들어오지 않는다. 그날 이후 어린 아이들이 사고로 인해 죽었다면 그렇게 가슴에 떨리듯이 아파온다. 내 아이 죽은 그때 마음으로 다시 느껴진다. 제가 본 것이 있어서, 보는 게 달라져서 말을 하게 되고. 나서는 것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앞에 나서게 되고, 그런 것들을 견디면서 엄청난 스트레스가 있었다. 지금도 스트레스가 없다면 거짓말이다. 지금도 ‘세월호’를 비난하는 말들이 귀에 들어오고 눈들이 가슴을 찢는 것 같고…. 예전에 편안한 개체로 걱정없이 살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되었다.
왼쪽부터 은유 작가, 안명미(문지성 어머니), 김미숙(김용균 어머니), 박래군 416연대 공동대표. 416재단 제공
# 우리가 달라진 만큼
-사회자 미류: 우리가 건너온 시간은 이 사건을 끊임없이 다시 겪는 시간이기도 했겠다. 그럼에도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변화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면 좋겠다.
-박래군: 가족들하고도 많이 싸우고 애들하고도 싸웠다. (웃음) 가족들과 5년의 시간을 보냈지만 초기엔 곁을 안 줬다. 나중에 들어보니 활동가를 처음 본 것이었더라. 뭔가 ‘꿍꿍이’나 ‘사심’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몇번 갔다가 퇴짜 맞고 그 다음부터 전국 서명운동을 하면서 가까워졌다. 안산에 가서 새벽까지 있기도 하고…. 유가족들이 맨 처음 힘들어했던 게 엄마·아빠로서 아무것도 못했다는 거였다. 억울하게 죽어간 아이들 한을 풀어야겠다, 엄마 아빠니까. 이전의 유가족들과는 달랐다. 이전 가족들이 활동가들에게 수동적으로 응하는 것이었다면 ‘세월호’는 아빠들이 스스로 피터지게 격렬하게 싸웠다. 하지만 엉망이 되지 않았다. ‘아이들이 지켜본다’고 정리가 되더라. 그 과정 거치며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안전사회 건설’까지 활동을 만들어내고 유가족이 그 운동을 끌고 갔다. 가족들이 발맞춰서 가고, 집단 토론의 수준도 높아지면서 달라지기도 했다. 지난 5년 동안 유가족들은 압축적으로 한국 사회 구조를 알게 됐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가족들이 새롭게 탄생해가는 것이다. ‘가족의 탄생’이라고 책에도 썼지만 본인도 새롭게 탄생하는 시간을 보내온 것이다.
-김미숙: 이번 일 겪고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다. 용균이 위해서 내가 뭘 해줄 수 있을까, 하고 무조건 해야만 했다. 두렵고 힘들다는, 그런 생각 할 처지가 아니었고, 끝없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했다. 어처구니 없는 이 사고를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저처럼 모르는 이들에게 하나라도 알리고 싶어서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죄인이어서, 내 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현장에서 인간 이하 취급을 받고, 자식이 찢겨 죽었는데 뭘 더 생각하나. 내 목숨이 하나도 안 아깝다.
이런 사회가 있었다는 게 나는 지금도 너무 충격이다. 민영화로 비정규직을 만들어 우리 아들이 죽은 것, 안전하지 않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앞으로도 죽을 것인데 그것을 내가 어떻게 보겠나. 그전에도 사고가 있었는데 본인 잘못으로 몰고 가서 그냥 덮어버리고 숨기고 가려고 하고… 그래서 우리 아들이 죽은 건데 저마저 가만 있는다면 딴 사람도 그렇게 죽어갈 것 아닌가. 그러니 나가야 한다. 어린 사람들, 얼마나 예쁜가. 꽃보다 사람이 더 예쁘다는 말, 안 와닿았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이렇게 많은 이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나처럼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 웃다가 울다가
-사회자 미류: 지금 우리는 세상의 부정의에 맞서서, ‘싸우는 사람’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세월호 가족들이 많기 때문에 서로 힘이 되기도 했지만 갈등도 있었던 것 같다.
-안명미: 우리의 힘은 아이들 죽음이 헛되지 않는 진상규명이 첫째였다. 유가족들은 많다. 전 사회생활 경험이 많지 않아 사람들 부딪침이 많지 않았다. 아이들을 오래 키우고 교회에만 있다보니 늘 양보하고 도와주는 상황이었는데. 유가족들과 있으면서 ‘참 여러 사람 있구나, 사람 성향이 참 여러가지구나’ 생각했다. 어떨 땐 면박이나 잔소리도 듣고…. 내가 잔소리 들을 사람은 아닌데, 자기 집에서 하듯 잔소리하는 사람이 있더라. 혼자 힘들어하고 몇번을 참다가 나중에 도저히 못참는다 하면 목소리를 더 크게 내기도 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잘 따지는 사람은 따지는 곳에 가서 일하고, 저같이 못 따지는 사람들은 합창을 하거나 했다. 그것도 못하면 상처받고 들어가 버리는 분들도 계시곤 했다. 다같이 사이좋게 잘 지낸다고 말하고 싶지만 (웃음) 여러 사람들이 있다보니 그렇게 되더라.
-사회자 미류: 유가족도 조력자로서 활동가라는 존재를 그 전에 본 적이 없고, 활동가들도 재난참사 피해자들을 별로 만난 적이 없었을 것 같은데 어떤 과정이 있으셨는지?
-박래군: 지금까지 재난 참사와 관련해 활동가와 사회운동가가 결합한 예가 거의 없었다. 대구지하철참사 지역대책위, 삼풍백화점 붕괴참사 때 일부에 국한될 뿐 나라가 알아서 하겠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1988년 28살 때부터 31년을 활동해왔는데 80년대는 의문사 문제로, 91년 분신정국에는 두 달 동안 영안실에 있을 때도 있었지만 재난참사 가족들을 이렇게 큰 규모로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정부가 잘 하는 건, 중요한 재난참사 때 유가족을 분열시키는 것이어서 세월호 단원고 학생 희생자 250명 유가족들이 회유와 분열을 이겨내며 나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단원고 희생자 유가족들은 쉽게 분열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열사 유가족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운동을 하면서 열사, 의문사와 산업재해를 입거나 노동운동을 하다가 큰 병을 얻어 돌아가시는 분이 많다. 그분들을 구분하기도 했는데 재난 참사 유가족을 만나면서 잘못된 구분이었다는 생각에 스스로 반성했다.
우리 사회는 유가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른다. 유가족은 웃을 수도, 울고만 있을 수도 없는 존재다. 웃는 게 맞느냐, 우는 게 맞느냐 한다면 다 맞다. 유가족이라고 매일 울 수 없으니까. 유가족들이 모인 ‘엄마 공방’에 가보면 엄마들이 웃다가 애 얘기하며 울다가 한다. 누구나 웃다 울다 하지 않나. “유가족이면서 웃네” 그러면, 주눅들어 숨어 들어가고, 그러면 유가족이 사는 게 힘들다. 악착같이 살아야 되는데.
# 그래도 곁을 지키는 사람들
-사회자 미류: 슬픔을 겪는다는 것은 새로운 관계나 사람들의 이야기가 새롭게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기도 하다.
-김미숙: 이전과 지금은 너무 다르다. 세월호 참사 때, 제가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암울한 한해였다. 저도 자식 가진 입장이라 (함께 슬퍼하는) 그런 마음으로 한해를 보냈다. 그 이후 사회도 조금씩 달라진 것 같다. 그간 돌아가신 고 황유미씨, 구의역 김군…. 이 죽음들에 사회가 그래도 아주 조금씩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들의 죽음도 잊혀지지 않고 조금이라도 사회 변화에 기여했으면 좋겠다. 우리 아들이 피켓을 들고 죽었다. 대통령을 만나 삶과 죽음이 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피켓을 들었다고 생각한다. 저도 그 마음 이어가려 한다. 여기 계신 분들도 내가 저 일을 겪으면 어떨까 생각하면서 우릴 봐주었으면 한다.
-안명미: 진도체육관에 있을 때 500명 자원봉사자들을 보고 나는 너무 놀랐다. 이런 국민들이셨구나. 나라는 아무것도 안해주는데, 도울 줄 아는 국민들이 이렇게 많구나…. 그뒤 서명받을 때도 활동가들이 우리 옆에 있었다. 박래군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우리와 함께할까, 희한하게 생각했다. 그밖에 광화문에서 만난 정말 많은 사람들을 보고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싸우는 한편 외롭기도 하지만 함께하는 이들 덕에 여기까지 왔다. 처음엔 혼란이 많았고 누굴 믿어야 할지도 몰랐다. 세상에 ‘정의’(justice) 가운데로 오는 사람들이 있구나, 나도 받은 걸 돌려줘야 된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내 일이 끝나면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려고 공부도 조금씩 하고 있다.
박래군 416연대 공동대표가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한 부분을 낭독하고 있다. 416재단 제공
# 더 이상 어둠을 겪을 수 없다
-사회자: 재난 참사의 해결이 사회변화와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박래군: 45시간 만에 강원도 산불이 진화되어 좀 나아졌구나, 사람들이 생각했다고들 한다. 세월호 참사의 교훈이 없었다면 소방청이 독립청이 되어 전국 각지에서 800여대 소방차를 신속하게 동원하기도 어렵지 않았을까. 세월호 참사를 통해 우리 세상이 지옥이었구나 확인했던 것이다. 바쁘게 정신없이 살아왔는데 사실 그게 옆 사람을 외면하게 만들고 각자도생, 경쟁, 효율만 추구하고 갈라치기를 한 것이다. 그 속에 있다가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잃어가던 공감력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전엔 누가 옆에서 죽어도 외면했지만 이제는 그러면 다같이 죽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같이 죽지 않으려면 공감하고 연대해야 살 수 있다. 정치 제도로 (사회구조를) 바꾸는 일이 지연되고 있긴 하지만. 세월호 참사를 통해 잊지 않겠다, 가만있지 않겠다, 이전과 달라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달라지고 있긴 하지만 세월호 참사 당시 4·16 이후 그렸던 것이 아닌 상황으로 가고 있어서 답답하긴 하다. 김용균씨 문제도 해결됐어야 할 문제였지만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고, 적폐청산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4·16 이전과 다른 세상 만들 노력을 어떻게 해가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은유: 세상이 왜 빨리 바뀌지 않는지, 급한 마음이 있다.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를 보면, 10년이 걸릴 것이라는 유가족의 이야기가 있는데 그 부분을 읽고 다시금 배웠다. 나는 두 아이 키우는 엄마로서 글쓰는 사람으로서 유가족의 말에 의지하며 세상을 보려고 애써왔다. <금요일엔 돌아오렴>(2015, 창비)을 보면, “내 자식만을 위해서는 내 자식을 위할 수 없다”는 얘기가 있는데, 강연 때 얘기를 많이 한다. 나는, 내 자식만은 참사를 피해갈 거다, 하지만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잘못된 구조로 피해 받은 사람들의 말이 사회에 많이 흘러다녔으면 한다. ‘내 자식’ 잘 되길 바라기보다 사회 건강성에 초점 맞춰 바꿔 나간다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눈뜬 분들께 배우는 자세로, 분별력 있는 시민으로 복귀하려 한다. 이번 책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서로 ‘곁’이 되어주길 바란다.
# 바라는 말
-안명미: 먼저 유가족들이 먼저 앞장 서서 (416운동을) 하고는 있지만 마음이 강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세월호’ 차를 타고 다니면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는 사람도 있다. “너희 때문에 이 나라가 이렇게 됐다”고까지 한다. 그게 아니란 것을 정말 알아주셨으면 한다. 노란 리본을 가방에 매달아 주셨으면 한다. 우리 아이가 죽었을 때 우리 아이의 죽음이 그냥 죽음이 아니길 바랐다. 안전한 나라로 가야 한다는, 그런 마음이 아주 강했다. 우리 아이들 통해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요즘 급하게 세월호참사 특별수사단 설치 청와대 국민청원을 하고 있다. 1기 특조위 때는 조사를 제대로 못하고, 2위 특별조사위원회가 생겼지만 수사권이 없는 상황이다. 들어가서 꼭 서명해주시길 바란다.
(국민청원 바로가기: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77697)
-김미숙: <전태일 평전>을 읽었다. 50년이 지났는데도 별로 변하지 않은 듯한 느낌이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마음이 암울했다. 지금은 차츰 변화가 있는 듯한 느낌이다. 국민들이 생각이 바뀌고, 언론도 나서주고, 사람들의 인식도… 안전하지 않은 사회를 좋게 만들려 생각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각자 자리에서 도와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사회를, 현실을 바꾸려면 노조 가입도 하고 각자 자리에서 거기부터 바뀌어야 한다. 젊은 분들도, 사회에 나와서 아무 생각 없이 일하지 말고 절실히 고민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용균이 일을 겪으면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하나하나 과정을 밟았다.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통과도 마음을 들었다 놨다, 사흘을 안절부절못하면서 얼마나 죽여야겠냐고 호통도 쳤다가, 꼭 도와달라고 여기저기 얘기했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대기업, 정부와 맞서 싸웠다. 어떻게 한사람이라도 더 알려서 하나라도 더 나서고 힘이 될까, 한해 수천명이 (산업 현장에서) 죽는데 크게 이슈화하지도 않고 당연히 사람이 죽는 것처럼 인식해서 정말 억울했다. 왜 없는 사람들은 대기업을 위해 죽도록 일하고 목숨마저 내놓고 힘없이 가야 하는가, 저도 똑같은 국민으로서 세금 내고 국민 한 사람으로서 인권을 가져야 한다 생각한다. 지금도 많은 서민들이 저와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하고 이 일을 한다. 각자 절실해서 한사람한사람 내가 아니면 절대 안 바뀐다는 생각하고 행동을 해야 나라가 바뀐다.
-박래군: 그동안 나라가 사실 많이 바뀌었다. 지금도 사람들이 바꾸고 있기도 하다. 어느 순간 후퇴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역사가 바뀐다. 유가족들이 버텨주고 싸워준 사람들, 시민이 함께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광화문에서 만난 초등학생, 중학생들이 스스로 ‘416 세대’라고 한다. 아픔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니까 한편 마음 아프다. 그들이 커나갈 땐 걱정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지금까지 5년 동안 나라가 바뀌었고, 앞으로도 바뀌어갈 우리 모두를 위해 박수를 보내자. 오는 4월16일 이전에 청와대 국민청원 꼭 20만이 넘었으면 한다.
-사회자 미류: 오늘 나와주신 이분들이 세상에 가장 많은 질문, 가장 늦게까지 답을 구하는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곁에 함께할 수 있는 건 시민의 의무이기도 하지만 권리이기도 하다. 곁에 있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길잡이가 되길 바란다.
글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사진 416 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