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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우리 시대 ‘이야기꾼’이 글로 쓴 초상

등록 2019-04-12 06:01수정 2019-04-12 19:31

초상들-존 버거의 예술가론
존 버거 지음, 톰 오버턴 엮음, 김현우 옮김/열화당·3만9000원

행동파 지성인이자 예술가인 존 버거(존 버저·1926~2017)의 부인 베벌리 버거는 2009년에 남편의 초고, 편지 등을 정리해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기증했다. 책 <초상들-존 버거의 예술가론>의 엮은이 톰 오버턴은 2010~2013년 ‘존 버거 아카이브’를 읽고 분류하는 작업을 맡았던 헨리 무어 연구소와 런던 킹스대학의 생애사 연구센터 연구원이다. 오버턴은 아카이브를 정리하는 동안 “버거가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있을 때에도, 미술에 대해 뭔가를 쓰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점점 더 크게 받게 되었다”고 했다. 가령 파이윰 초상화는 버거의 소설 의 초고와 초판의 면지에 모두 등장한다.

만년의 존 버거. 열화당 제공
만년의 존 버거. 열화당 제공
젊은 시절 존 버거는 화가로 활동했으며, 그의 초기 자료는 미술평론이 대부분이다. 비록 버거 스스로는 “미술평론가로 불리는 것이 늘 싫었다”고 토로하지만, 오버턴은 “버거가 이야기꾼으로 발전하는 내내 시각예술을 감상하는 경험은 나름의 역할을 유지”했으며 “버거의 글쓰기 중 많은 부분이 미술에 대한 응답”이라고 봤다. 오버턴이 1952~2013년 사이 버거가 예술가들에 대해 쓴 글들을 모아서 선집을 엮은 이유다. 책은 기원전 3만년께 활약한 쇼베 동굴벽화의 화가들부터 동시대 팔레스타인 상황을 표현한 조각가 란다 마다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들에 대한 연대기 형태로 구성됐다. “버거식의 미술사”로 보인다.

책 <초상들>에 실린 도판은 모두 흑백이다. 존 버거는 머리말에서 “요즘 같은 소비주의 시대에, 광이 나는 천연색 복제화는 그 이미지를 통해 전달되는 대상을 백만장자들을 위한 장식품으로 축소시켜 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며, “그에 반해 흑백으로 된 복제화는 단순한 기록”이라고 밝혔다. 위 도판은 책에 담긴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옷을 입은 마하>(1800-1805). 열화당 제공
책 <초상들>에 실린 도판은 모두 흑백이다. 존 버거는 머리말에서 “요즘 같은 소비주의 시대에, 광이 나는 천연색 복제화는 그 이미지를 통해 전달되는 대상을 백만장자들을 위한 장식품으로 축소시켜 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며, “그에 반해 흑백으로 된 복제화는 단순한 기록”이라고 밝혔다. 위 도판은 책에 담긴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옷을 입은 마하>(1800-1805). 열화당 제공
버거의 특장점인 ‘다른 방식으로 보기’와 비범한 문체가 고스란히 담겼다. 버거는 이미 숨진 예술가일지라도 그가 살았던 시대, 그의 삶을 입체적으로 상상하며 지금 여기 우리와의 연결고리를 찾아내고야 만다. 버거에게 1~3세기에 제작된 파이윰 초상화는 예술이 상품화되고 복제되기 이전에 화가와 모델의 ‘이인칭’ 관계가 가능했던 상황을 알려준다. 훗날 화가가 그림의 감상자를 의식하며 모델에게 ‘삼인칭’으로 다가가게 된 초상화와 다른 점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끊임없이 열변을 토하며” “시끄럽게 말을 걸게끔 제작”되는 얼굴 이미지들에 포위된 채 자신의 살아 있음을 감각하게 된 상황과 이어진다. “살아 있는 연관 관계에 대한 감각이야말로 버거가 이야기꾼으로서 자신의 소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었다.”(톰 오버턴)

관습적인 평론 형태의 글만 실린 게 아니다. 버거의 에세이와 소설, 버거가 딸 혹은 친구와 주고받은 편지 등이 포함됐다. 버거가 조각가 후안 무뇨스의 사망을 애도하며 쓴 에세이는 더 오래전에 사망한 터키 시인 나짐 히크메트에게 쓰는 편지 형식이다.

예술가들을 대하는 버거의 태도 혹은 변화도 엿볼 수 있다. 영국의 유명 화가 리언 코소프 편은, 버거가 1959년 주간 <뉴스테이츠먼>에 쓴 평론에 뒤이어 1990년대 버거와 코소프가 주고받은 편지가 수록돼 있다. 버거는 공손하고 섬세하게 코소프의 작업실 환경, 작업하며 듣는 음악 등을 묻는다. 프랜시스 베이컨 편에서는 버거가 1950~1970년대까지 베이컨의 작품을 월트 디즈니와 비교하며 “순응적”이라고 판단한 글 다음에, “내가 이전에 알아채지 못했던 점”을 털어놓는 2000년대 글이 실렸다. 오버턴이 <초상들>에 이어 버거의 예술론을 엮은 <풍경들>은 올해 여름 국내 출간 예정이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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