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현상학 강독 1
G. W. F. 헤겔 지음, 전대호 옮기고 씀/글항아리·2만2000원
근대 서양 철학자 중에서 헤겔만큼 극단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근대를 넘어서려는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에게 근대정신의 완성자인 헤겔은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었다. 반대로 헤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카를 마르크스를 이해하기 위해서, 헤겔과 라캉의 현대적 계승자인 슬라보이 지제크의 영향 등으로 헤겔을 읽고자 시도하는 사람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헤겔의 저작들은 쉽게 정복을 허락하지 않는 험준한 산이었다. 독일인들도 이해하기 어려워할 정도로 난해한 저서를 번역을 통해서 접할 수밖에 없는 한국 독자들의 어려움은 한층 더했다. 특히 헤겔의 대표작인 <정신현상학>은 그동안 고 임석진 명지대 명예교수의 번역이 사실상 유일했으나, “과도하고 자의적인 의역, 문맥의 오해, 명백한 문법적 또는 구문론적 오역”(김준수 부산대 교수) 등 많은 문제점을 지적받아왔다.
독일 화가 야코프 슐레징어가 1831년 그린 헤겔의 초상화. 출처 위키미디어
하지만 이제 ‘르네상스’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새로운 <정신현상학> 번역들이 쏟아져나올 예정이다. 이번에 <정신현상학 강독 1>을 출간한 철학자 전대호가 첫 주자로 스타트를 끊었다. 이어 내년 말을 목표로 이종철 연세대 박사가 도서출판b에서, 권영우 한국외대 교수는 2021년께 세창출판사에서 번역본을 출간할 예정이다. 김준수 교수는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 사업으로 2021년 번역을 완료하기로 했고, 박병기 전남대 박사도 도서출판 길(시기 미정)에서 번역본을 준비중이다.
아직 다른 번역본들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속단하긴 어렵지만, 아마도 재야 철학자인 전대호의 <정신현상학> 번역은 개중에서도 급진적인 편에 속할 가능성이 크다. 그의 번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그동안 딱딱한 한자어로 번역한 학계 표준번역어들을 일상에서 사용하는 순우리말로 바꿔 옮겼다는 것이다. ‘무매개적’으로 번역되었던 ‘unmittelbar’를 ‘단박’, ‘지양’이라고 번역되었던 ‘aufheben’은 ‘거둠’으로 번역했다. 특히, 헤겔 철학에서 가장 악명 높은 용어인 ‘즉자’(Ansich), ‘대자’(Fuersich), ‘즉자대자’(Anundfuersich)는 각각 ‘그 자체’, ‘자기를 마주함’, ‘그 자체이며 자기를 마주함’이라고 옮겼다.
그는 뒤의 세 용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곧 “헤겔 철학 전체의 줄거리를 환히 꿰는 수준”이라며 곧바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낙심하지 말라고 말한다. 대신 그는 이해를 돕기 위해 홍길동을 사례로 이 세 개념을 설명한다. 먼저 서자로서 자기의식이 없는 꼬마 홍길동의 상태는 ‘홍길동 그 자체’다. 하지만 성장하며 서자라는 자의식을 품고 자신과 불화하게 되어 길을 떠나 외톨이가 된 홍길동, 자기로부터 멀어지면서 ‘자기와 화해한 홍길동’이라는 목적지로 나아가는 홍길동이 바로 ‘자기를 마주한 홍길동’이다.
그렇다면 ‘그 자체이며 자기를 마주한 홍길동’은 무엇일까. 전대호는 일반적인 헤겔 해석자들이 이를 ‘해탈한 홍길동’으로 설명해왔다고 지적한다. 대신 그는 이를 역동적 부정성을 품은 ‘홍길동의 일생’ 또는 ‘홍길동다운 홍길동’으로 봐야한고 말한다. 특히 그는 우리말 ‘다움’엔 외국어로 번역되지 않는 헤겔 철학적인 의미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환호작약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라는 저잣거리의 말엔 ‘사람임’이라는 존재에 그치지 않고 실천을 통해 ‘사람다움’의 내용을 채워나가야 한다는 헤겔의 사상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정신현상학> 서문에 나오는 “내가 깨달은 바로는, 모든 것이 걸린 관건은 진실을 실체로서뿐 아니라 또한 마찬가지로 주체로서 파악하고 표현하는 것이다”라는, 헤겔이 자신의 깨달음을 요약한 ‘오도송’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내가 깨닫고 보니 사람임에 머물지 않고 사람다움에까지 이르는 것에 만사가 달렸더라.” 감각에 매몰된 인간의 정신이 자기를 인식하는 과정을 다루며, 정신의 본질이 자기 자신을 실현해가는 자유임을 밝히는 <정신현상학> 전체의 논지가 이미 서문에서부터 예고되는 것이다.
2부에서 진행되는 강독은 한줄 한줄 해설해나가는 대신 넓은 보폭으로 따라가면서 주제에 대한 해설과 사상사적 맥락을 담은 에세이 성격의 글들이 이어진다. 그는 특히 “헤겔을 절대정신, 시대정신처럼 개인이 범접할 수 없는 어떤 막강한 힘을 준엄하게 선포한 인물”로 보는 기존의 오해를 벗기는 데 주력한다. “자신의 불완전성을 자각하는 사람, 바로 그것이 헤겔이 말하려는 진실의 진면목에 가깝다” “헤겔 철학이 그리는 주체는 찢어진 주체이지, 소위 절대자가 아니다”라는 대목들이 그렇다.
철학자 전대호는 2017년 말부터 1년여간 서울 종로구 옥인동 ‘길담서원’에서 진행한 헤겔 <정신현상학> 강독 모임의 결과물을 엮어 <정신현상학 강독 1>을 출간했다. 전대호 제공
이런 파격적인 번역과 강독은 강단 바깥에서 이뤄진 작업이라는 데서 연유하는 면도 있어 보인다. 전대호는 독일 쾰른대에서 헤겔 철학을 전공하고 박사 논문을 쓰던 도중에 귀국해 번역가로 정착했다. 강독 역시 대학이 아닌 작은 공부모임에서 이뤄졌다. <정신현상학> 1~3장의 번역을 실은 1권은 서울 종로구 옥인동 ‘길담서원’에서 예닐곱 명의 회원들과 2017년 10월부터 1년이 좀 넘게 진행한 강독을 함께 담고 있다. 이후 강독 모임이 진행되는 대로 5권까지 차례로 출간할 예정이다.
대학 바깥에서 이뤄진 전대호의 파격적인 번역과 해설은 어떤 영향을 미칠까? 전대호의 후속 번역과 다른 학자들의 번역을 계속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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