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冊지현경 글·그림/책고래·1만3000원
요즈음 책은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다. 심지어 폐지더미로 무게를 달아 넘겨지기도 한다. 출판기술 발달 덕분에 쉽게 찍어내고 쉽게 버릴 수 있는 책, 귀한 걸 잊고 산다. 영상이 대접받는 시대, 책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책>을 제목으로 세운 이 그림책은 책을 사이에 둔 두 소녀의 우정을 통해 책의 향기를 전한다. 양반과 평민이란 신분을 넘어서 생각을 잇고 성장시키는 공간이 책놀이터다. 조선 후기 유행했던 책그림 민화 <책가도>를 옮겨놓은 듯한 옛서재를 배경으로 따스한 이야기를 입혔다.
책이 희귀했던 시절로 들어가 보자. 일일이 붓으로 글을 쓴 다음 구멍을 뚫어 제책을 하고 필사를 통해야만 책을 유통시킬 수 있던 시절, 책 속 지식은 극소수의 전유물일 수밖에 없었다. 양반집 아이 연이는 책을 갖춘 집에 산다. 책과 골동품, 모란꽃 등이 단아하게 그려진 <책가도> 속 서재는 책벌레 연이의 놀이터다. 색동저고리 차림의 연이는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는 대신 늘 책에 얼굴을 파묻고 산다. 무명저고리를 입고 말동무가 되어주려 연이네를 찾은 순이는 방구들이 내려앉을 만치 쌓인 책을 보고 놀란다. 평민인 순이로서는 진귀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쓰고 또 쓰고, 다독의 힘을 보여주는 연이. 이를 재미있게 읽는 독자 순이. 책고래 제공
연이는 순이가 있는지 없는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순이도 채근하지 않고 연이가 밀쳐둔 책을 보다 집으로 돌아가곤 한다. 그러는 사이 순이도 책의 세계로 빠져든다. “집에 가져가도 돼.” 연이가 슬쩍 내민 책 한 권의 선물로 둘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책 한 권이 얼마나 귀했으면, 책을 안고 하늘을 나는 순이의 모습은 세상을 다 얻은 듯하다.
책 한 권을 순이에게 슬쩍 내미는 연이. 책고래 제공
다독으로 넘쳐흐르는 연이의 생각 창고에선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오고, 순이는 산길을 오가는 길에서 만난 꽃과 나비 이야기며, 쉴 새 없이 종알댄다. 책 속에만 빠져 있던 연이는 이제 바깥세상을 글에 녹이는 작가가 될까? 책 속 무궁한 이야기에 빠진 순이는 커서 책을 만드는 편집자가 될까? 순이네 집에서 일어난 기적같은 마지막 장면을 보며 책 이야기를 나눠봐도 좋겠다.
동생을 돌보려 떠난 순이를 찾아나서는 연이. 책고래 제공
사실 이 책은 민화가 변주된 그림책이라 할 만하다. 디자인을 전공하고 10여년간 민화 작업을 해온 지현경 작가는 격자문양의 책이 빚는 민화의 현대적 미감에 주목했다. <책가도>는 한 구도에 모든 걸 담는 서양 입체파의 세련미를 지녔다. 전통적인 해학미가 풍기는 <화조도> <접묘도> 등에 나오는 새와 꽃, 개와 고양이, 나비가 두 주인공과 어우러지며 민화의 아름다운 세계로 이끈다. 지 작가는 민화의 느낌을 잘 살리려고 “한지에 커피로 물을 들였다”고 한다. 사각형을 이루는 책과 책장은 파란색 외곽선으로 처리해 깔끔한 추상미를 더한다. 초등 1학년 이상.
권귀순 기자
gskwon@hani.co.kr, 책고래 제공
‘마을 도서관’이 된 순이네 집. 책고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