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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노예처럼 부려지다 내버려진 소년들

등록 2019-04-12 06:00수정 2019-04-12 19:29

아무도 내게 꿈을 묻지 않았다-선감학원 피해생존자 구술기록집
하금철·홍은전·강혜민·김유미 지음, 비마이너 기획/오월의봄·1만5000원

“서로 마주 보고 서로의 뺨을 한 대씩 때렸다. 내가 널 때리고, 네가 날 때리고. 이상했다. 전날만 해도 함께 도주를 계획했던 우리인데 오늘의 우리는 죽일 듯이 서로의 뺨을 휘갈기고 있었다.” (선감학원 피해생존자 김성환)

수렁에 빠진 소년들이 있다. 동네서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친척 집을 찾아 서울에 왔다가, 생계를 위해 구두닦이 상자를 목에 걸고 나왔다가 죄 없는 소년들은 섬에 기약 없이 갇혀버린다. “집에 가는 게 최고의 꿈”이 되어버린 열너댓 살 소년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갯벌을 달리고, 바다를 헤엄친다. 언제든 소년들을 삼켜버릴 수 있었던 갯벌 수렁에서 온몸으로 살아나와 지금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 시절 소년들은 선감학원 피해생존자들이다.

진보장애언론 <비마이너>가 선감학원 피해생존자 아홉 명을 만나, 그들이 통과해온 처참하고 쓰라린 50여년의 세월을 듣고 기록했다. 선감학원은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도에 있던 소년 수용소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부랑아 단속 및 수용 조치를 위한 감화정책으로 1942년 설립되었고 1982년까지 40년간 존속했다. 부랑 아동을 보호·수용한다는 취지와는 달리 강제 납치와 감금이 이뤄졌고, 보호자 없는 부랑아뿐 아니라 단순히 길을 잃은 미아까지 납치해 시설에 수감했다.

책은 고도성장기 한국 사회가 어떻게 소년들을 외면했고, 노예처럼 착취했는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경찰이 어떻게 그랬냐는 말이에요… 경기도가 운영하고 국가가 관리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느냐는 말이에요….” 1963년 13살 때 경찰 손에 강제로 선감학원에 끌려갔다 2년 만에 탈출한 김성민씨의 토로는 국가가 가난을 숨기기 위해 얼마나 손쉽게 한 사람의 소년기를 파괴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시설로 잡혀간 아이들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각종 노역과 모진 고문, 폭력에 노출됐다. 소년들은 선감학원에서 노예처럼 부려지다 쓸모를 다하면 사회에 다시 버려지거나 형제복지원, 삼청교육대와 같은 다른 시설이나 수용소로 끌려갔다. 책은 “쟤는 뭐하는 놈인데 선감학원도 가고 형제원도 갔느냐고 할까 봐” 말을 아꼈다는 생존자의 증언을 통해 사회가 얼마나 손쉽게 불량의 낙인을 찍고 이들을 소외시켜 왔는지 보여준다.

“그 정도의 고통을 겪은 이라면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있었겠는가.” 피해자 이대준씨의 구술을 맡은 하금철은 인터뷰 후기에서 눈물 흘리는 피해자의 모습에 놀랐고, 그보다 그걸 보고 놀라는 자신에 더 놀랐다고 적었다. “힘들게 살아서 눈물이 다 말라버린 줄 알았다”며 아이처럼 우는 여든 노인의 트라우마는 2019년 지금도 현재진행 중이다.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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