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1919>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가 3·1운동과 관련돼 잘못 알려진 사실들에 대해 바로 잡는 설명을 하고 있다. 다산북스 제공
3·1운동 당시 인쇄됐다고 알려졌던 독립선언서 판본 중 하나는 실제로 3·1운동 당시에 인쇄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왔다.
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1919>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박찬승 한양대 교수(사학과)는 “그동안 3·1운동의 준비부터 임시정부 수립 과정까지 전체 과정을 정리한 책이 없었다”며 “사실관계가 잘못 알려진 부분도 많아 이번 책으로 바로잡았다”고 말했다. 박 교수가 바로잡은 내용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현재 국가지정기록물로 등록되어 있고, 2016년에 서울시에서 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한 ‘신문관판’ 3·1독립선언서가 해방 이후에 제작된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학계 일부에선 신문관판 독립선언서를 두고 ‘보성사 인쇄소에서 최종 인쇄가 되기 전에 최남선이 운영하는 신문관 인쇄소에서 인쇄된 판본’이라고 판단해왔다.
하지만 보성사 대표인 이종일을 판사가 심문한 기록을 보면, 민족대표 33인의 명단이 확정된 것은 3·1운동 직전인 2월27일 저녁 보성사에서 인쇄 작업을 하는 도중이었다. 보성사에서 인쇄 직전에 지형을 제작할 때 첫번째와 두번째 지형에는 31인의 명단이 있었지만 세번째 지형엔 33인으로 늘어나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 쪽 참석자들의 명단을 확정하는 회의 자리에 있던 오세창 선생이 전화를 걸어와 명단의 교체를 요청해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전에 33인의 명단이 인쇄된 신문관판이란 애초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결론이다. 박 교수는 “신문관판이란 이름이 붙은 선언서는 보성사판과 활자가 전혀 다르고, 현대 문법에 가깝게 표기가 됐다”며 “아마도 해방 이후 3·1절 기념행사 같은 데서 기념품으로 주기 위해 새롭게 인쇄한 독립선언서를 후손들이 원본으로 착각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또 현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에서 ‘독립선언서 중 공약 3장의 집필자는 한용운’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도 바로잡았다. 박 교수는 “최남선과 최린, 한용운 등의 법정 심문기록을 살펴보면,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최린과 여러 차례 상의한 끝에 전체를 집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용운은 선언서 작성에 관여한 바가 없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이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혁명이라는 말은 국내적 관계에서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우는 상황에 써야 한다. 제국주의 외세에 맞서 싸운 것은 독립운동이라 부른다”라며 “둘은 성격이 다른 용어다. ‘혁명은 높고 운동은 낮은 표현’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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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보성사판 독립선언문. 출처 독립기념관
신문관판 독립선언서는 오수열씨가 소장하고 있다가 작고 후에 유족들이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출처 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