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아이디어아마르티아 센 지음, 이규원 옮김/지식의날개·3만3000원
인도 벵골(현 방글라데시) 출신 경제학자인 아마르티아 센은 아시아인 최초로 199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사회 선택 이론’을 재정비하고 후생경제학을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았던 그는 경제학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불평등, 빈곤과 같은 사회정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연구는 윤리학과 정치철학을 포괄했다. 이런 그의 정치철학 연구가 집약된 저서가 바로 <정의의 아이디어>다.
그가 정의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넘어야 할 거대한 산맥이 있었다. 바로 근대의 홉스, 로크, 칸트로부터 현대의 존 롤스, 로널드 드워킨, 로버트 노직으로 이어지는 사회계약론 전통에 있는 주류 정치철학이었다. 센이 보기에 이들 사회계약론자의 공통적인 문제는 ‘선험적 제도주의’에 빠져 있다는 점이었다. 즉, 사람들이 원초적인 무질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사회계약을 맺을 때 합의할 수 있는 완전한 정의가 무엇이고 공정한 제도가 무엇인지 규명하려는 데 매몰되었다는 지적이다.
아마르티아 센의 관심사는 체계적으로 완성된 ‘정의론’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불완전한 현실세계에서 정의를 실천하도록 돕는 ‘정의의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데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그중에서도 그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인 롤스의 정의론을 주요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롤스는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이나 기득권을 알 수 없도록 하는 ‘무지의 베일’을 쓴 ‘원초적 입장’이라면 자신이 정식화한 정의의 원칙이 만장일치로 채택되리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센은 “그의 원초적 입장이라는 공정한 환경에서 왜 다른 대안들은 주목을 끌 수 없는지 보여주지 않는다”고 롤스를 비판한다. 센은 여기서 ‘피리 하나를 두고 다투는 세 아이의 문제’를 제기한다. 피리를 불 수 있는 아이(공리주의자), 가난해서 장난감이 없는 아이(경제평등주의자), 피리를 만든 아이(자유의지론자) 중 누가 하나밖에 없는 피리를 가져야 하는가? 그는 이 각각의 주장들은 모두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어떤 원칙에 따라 하나를 항상 가장 낫다고 표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센은 롤스 등의 ‘장치 중심적 개념’을 자신의 ‘실현 중심적 이해’와 구분하며, ‘사회 계약’보다 ‘사회 선택’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편다. 그는 애덤 스미스, 콩도르세, 벤담, 마르크스, 존 스튜어트 밀로 이어져 온 또 다른 전통에 서서, 정의의 현실화에 관심을 둔 ‘비교론적 접근법’을 취한다. 이들은 공정한 사회가 무엇인지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미 존재했거나 실제 출현할 가능성이 있는 사회를 비교하는 데 참여”하며 “명백한 부정의를 제거하는 데 관심”을 가진 이들이었다. 특히 센은 18세기 콩도르세부터 시작해 20세기 케네스 애로에서 지금의 형태를 얻은 사회 선택 이론의 계승·발전자로서 이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데 큰 관심을 보인다.
‘콩도르세의 역설’, ‘애로의 불가능성 정리’ 등 사회 선택 이론 자체는 수리·논리학적인 이론이다. 센은 수식 대신 그 함의를 설명하는데, “어떤 사회 선택의 절차가 아무리 합리적이고 민주적일지라도 사회 구성원이 바라는 것을 결정하기 위해 정당하게 배려되어야 할 아주 가벼운 조건들마저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다”는 역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불가능성과 교착 상태를 규명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사결정 절차에 더 많은 정보를 반영하고, 각자의 편익을 비교함으로써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데 이 이론의 중요한 기여가 있다.
이에 따라 센은 반드시 어떤 가치가 우선한다는 완전한 이론이 없어, 여러 선택지 간의 온전한 순위를 매길 수 없는 해결책이라도 큰 문제가 없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여러 선택지 각각의 정보를 모으고 비교하는 일을 통해 가장 정의롭거나 불의한 선택지를 골라내는 데 있다. “예컨대 전 국민 의료보험과는 거리가 먼 미국의 현 상황이 여러 제도를 통해 그것을 실현하는 특정 대안들보다 명백하게 덜 정의롭다면, 현 상황보다 뛰어난 모든 선택지가 정의의 이유에 따라 완전히 순위 매겨지지 않을지라도 정의를 이유로 현 상황을 거부할 수 있다.”
체제 간의 비교를 핵심으로 하는 관점의 또 다른 강점은 한 국가를 넘어선 지구적 차원의 정의를 제대로 다룰 수 있다는 데 있다. 센은 에이즈 등으로 고통받는 가난한 환자들이 약을 더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특허법을 바꿔야 하는 글로벌 정의의 문제를 생각해보자고 한다. 센은 “이런 종류의 논의는 완벽한 제도의 조합을 통해 정의의 원칙을 적용할 주권국이 필요하다는 홉스적―그리고 롤스적―주장에 설복된 이들에게는 한낱 ‘산만한 이야기’로 들릴 것”이라고 지적한다. 반면 사회 선택 이론은 글로벌 정의와 민주주의를 모순 없이 중요한 논제로 설정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분투하는 국제기구·비정부기구·활동가·언론의 역할에 이론적 정당성을 제공해준다. “민주주의를 공적 추론의 측면에서 본다면 글로벌 민주주의의 실천을 무기한 보류하지 않아도 된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목소리는 다양한 원천에서 비롯되며, 거기에는 국제기구뿐만 아니라 덜 공식적인 소통 및 교류도 포함된다.”
책을 낼 당시 76살이었던 센이 책을 맺으며 하는 말은 간단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기아에서 압제까지) 이런저런 곤궁이 너무나 많다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현실이지만, 우리가 만일 소통할 수 없고 대답도 논쟁도 할 수 없었다면 훨씬 더 끔찍했을 것이다.”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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