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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엄마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

등록 2019-04-05 06:01수정 2019-04-09 17:11

‘펀 홈’ 작가 벡델의 두번째 회고록
냉정한 엄마와 레즈비언 퀴어작가 딸
수십년 애증관계 끝 여성서사 완성
당신 엄마 맞아?
앨리슨 벡델 지음, 송섬별 옮김/움직씨·2만5000원

“엄마가 별안간 굿나잇 키스를 그만뒀을 때 나는 따귀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고작 7살 때였다. 뽀뽀도 해주지 않고 쌩하게 방을 나가버린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침대에 누운 어린 아이는 충격에 빠졌다. 대학생이 되어 뒤늦은 무의식의 복수라도 하듯 딸은 부모에게 편지를 보냈다. “저 레즈비언이에요.” 아버지는 누구나 한번쯤 탐색해 봐야 할 일이고 건강한 생각이라며 수긍하는 눈치였지만 어머니는 차가운 답장을 보내왔다. “동성애에도 억압과 착취가 있지 않겠니? 그냥 네 할 일에 집중하면 안 되겠니?”

그리고 몇 달 뒤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숨졌다. 대대로 장례식장을 운영하면서 교사로도 일했던 지성적인 아버지는 ‘클로짓 게이’(게이임을 밝히지 않는 이른바 ‘벽장 게이’)였고, 44살이란 젊은 나이에 트럭에 치이고 말았다. 딸은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여긴다. 미국의 레즈비언 퀴어 만화가 앨리슨 벡델은 영화 속 성평등 지표인 ‘벡델 테스트’를 고안한 작가로 유명하다. 그의 첫 그래픽노블인 <펀 홈>(Fun Home, 미국판 2006)은 ‘정상 가족’과는 거리가 먼 작가의 내밀한 집안사를 다루어 비평과 상업적인 면에서 동시에 성공을 거뒀고 2015년 제작된 동명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그해 토니상을 5개나 휩쓸었다.

베스트셀러 그래픽노블 <펀 홈>에 이어 벡델이 펴낸 <당신 엄마 맞아?>(Are you my mother?) 속 한 장면. 딸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 냉정한 엄마, 게이임을 숨기고 살다 세상을 떠난 아빠 사이에서 작가는 불안과 강박에 시달리며 심리 치료를 이어간다. 움직씨 제공
베스트셀러 그래픽노블 <펀 홈>에 이어 벡델이 펴낸 <당신 엄마 맞아?>(Are you my mother?) 속 한 장면. 딸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 냉정한 엄마, 게이임을 숨기고 살다 세상을 떠난 아빠 사이에서 작가는 불안과 강박에 시달리며 심리 치료를 이어간다. 움직씨 제공
<당신 엄마 맞아?>(Are you my mother?, 미국판 2012)는 벡델의 냉소적이고도 섬세한 회고록 2탄. 실비아 플라스를 읽은 적이 없는 딸과 버지니아 울프를 읽은 적이 없는 엄마가 서로 반목하는 가운데 딸의 연인, 심리치료사, 정신분석가 들의 이야기가 팽팽하게 얽히고설키며 ‘여성 서사’를 완성한다. 심리학, 정신분석학은 물론이고 퀴어 이론, 모성 연구, 가족론을 망라해 기존의 ‘모녀심리학’을 넘어서는 깊이감을 만든다.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연극배우로 일했던, 지성과 매력을 갖춘 강박 성격의 엄마는 남편의 파트너십을 기대하지 못한 채 홀로 외롭게 양육과 가사일에 매달렸다. 딸은 딸대로 어린 시절 돌연 스킨십을 중단해버린 어머니와 다른, <사운드 오브 뮤직>에 등장하는 따사로운 모성을 꿈꾸기도 하면서 위태로운 성장기를 보냈다. 집안에서 제 역할을 못하고 차가운 가면을 썼던 유약한 성격의 아버지와 딸마저 질투하고 깎아내리는 냉정한 어머니는 그뒤 딸이 갖게 된 우울, 불안 장애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20대 중반부터 폐경기 중년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심리치료와 정신분석을 받으며 작가는 남편이 게이라는 것보다 딸이 레즈비언이라는 것을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어머니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강박적으로 일기를 쓰고,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정신분석가인 도널드 위니캇, 카를 구스타프 융,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이론을 쉼없이 파고든 결과다. 어머니와 격렬한 전투를 치르면서 휴전을 거듭하던 딸은 마침내 깨닫는다. 어머니에게서 충분히 받지 못한 것이 있었지만 그 대신 훨씬 더 값진 것을 받았다는 사실을. 프로이트의 ‘남근선망’을 비웃던 어린 시절의 엄마, ‘가운데 물건’이 달린 듯 우스꽝스럽게 걸으며 연극적인 표현을 하던 엄마, 상상의 공간으로 문을 활짝 열어주던 어린 시절의 엄마를 재발견하고 복원한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책이 나온 뒤, 엄마는 책이 일관되고 주제도 명확하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야기에 복무해야 하는 거야. 그래, 가족 따윈 얼어죽을!” 서로 신경을 북북 긁으며 진심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다가 말곤 했던 둘 사이 애증은 치유와 공감으로 변모하고, 언짢기만 했던 모진 어머니와도 뜨겁게 화해한다. “마침내 나는 엄마를 파괴했고 엄마는 파괴로부터 살아남았다.” 작가는 약 20년에 걸쳐 ‘엄마’와 ‘가족’을 낱낱이 헤집어가며 파괴하지만, 심리치료사의 말대로 그건 “대부분 사랑과 관련 있는” 일이었다.

인물의 심리 묘사와 표정은 전작 <펀 홈>에 견줘 한층 더 세련되고 고급스럽다. 벡델 자신의 생애사와 연애담, 오랜 정신분석의 기록, 부모의 생애는 물론이고 버지니아 울프, 에이드리언 리치, 실비아 플라스 등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교차 편집되는데다 어려운 정신분석 텍스트들까지 개입하여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지만 그만큼 중층적인 의미와 깊이를 더해, 거듭 읽어도 매번 새롭다.

책을 펴낸 도서출판 움직씨는 2016년 성폭력 퀴어 생존자 이야기를 다룬 <코끼리 가면>을 시작으로 <첫사랑>(2018) <펀 홈>(2018) 등 지금까지 꾸준히 퀴어 페미니즘 출판을 해왔다. 이 중에서도 벡델의 <펀 홈>은 전국 독립서점가를 비롯해 마니아팬층을 형성하며 지금도 꾸준히 팔려나가고 있다. 노유다 편집장은 “이번에도 별다른 홍보를 하지 않았는데 출간 즉시 인터넷 서점에서 그래픽노블 부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전국 대형서점에도 상당수 배본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사진 움직씨 제공

<펀 홈> <당신 엄마 맞아?>의 작가 앨리슨 벡델. ⓒElena Seibert
<펀 홈> <당신 엄마 맞아?>의 작가 앨리슨 벡델. ⓒElena Seib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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