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데리다 지음, 배지선 옮김/이숲·1만원 거짓말의 역사
자크 데리다 지음, 배지선 옮김/이숲·1만원 “용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었다.” 철학자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는 홀로코스트 같은 ‘반인류 범죄’는 용서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인류의 인간성을 겨냥”한 범죄는 ‘속죄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또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놓인 희생자들을 위해서 가해자들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도 역설한다. 일본군 ‘위안부’ 가해자, 민간인 학살 가해자가 용서를 얻음으로써 ‘평안’과 ‘구원’을 얻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더구나 이런 범죄의 피해당사자와 가해자 다수는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그렇다면 대체 누가 누구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 자크 데리다는 <용서하다>에서 장켈레비치의 주장을 논평하며,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용서해야 용서’라는 아포리아로부터 사유를 전개한다. “누구나 쉽게 용서할 수 있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기에, “용서-불가능한 일을 용서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에야 용서의 ‘가능성’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피해의 ‘회복 불가능성’은,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용서의 시간성을 환기한다고 본다. 데리다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파울 첼란이 나치에 참여한 마르틴 하이데거를 만나고 쓴 시 ‘토트나우베르크’ 속에서 “맞이해야 할 것”으로서의 용서와 희망을 읽는다. 데리다가 생각하기에 장켈레비치도 1980~81년 용서를 비는 한 독일 청년과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용서의 실현가능성을 암시했다. 용서는 단번에 이뤄지지 않으며, 다만 화해를 목적으로 꾸준히 시도되어 역사를 지속시킬 수 있다. ‘순수하고 투명한’ 용서가 존재한다는 식의 형이상학 사고를 해체하는 대신, 이를 구성하는 시간 속에서 ‘모호함’과 ‘수행성’의 의미를 부각하는 데리다의 작업은 <거짓말의 역사>에서도 이어진다. 그는 ‘거짓말’을 ‘진실’과 대립되는, 근본적인 악함으로 규정하는 인식론에 균열을 낸다. 1995년 일본의 무라야마 총리가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를 발표한 일이 해석 사례로 등장한다. 데리다는 ‘무라야마 담화’가 “일본이라는 국가를 직접적인 책임자로 지목하지 않고, 제국적 정체성의 연속성에 천황을 연루시키지 않”은 등 불완전하고 “철저히 계산된 정세적 전략”일지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한다. 공론장에서 구하는 용서는 2차 세계대전 뒤 ‘반인류 범죄’ 같은 새로운 사법 개념이 국제법 차원에서 등장한 역사에 영향을 받은 것이며, ‘진실을 생산’해 냈다. 홀로코스트 부정, 일본 우익의 식민지배 역사 왜곡, 자유한국당 일부 의원의 5·18 민주화 운동 왜곡 등 “수정주의와 부인주의의 광적인 형태들”에 맞서는 싸움에 필요한 건 무엇일까. 데리다는 ‘순수한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며, 최후 승리할 것’이라는 낙관주의를 경계한다. 진실을 위한 싸움은 용서와 화해처럼 “늘 다시 시작해야 하는 끝없는 과제”다. “끊임없이, 필요할 때마다 담론과 증거와 증언의 환기, 기억 작업과 훈련, 자료의 타협 없는 논증”으로 대항해야 한다. 이러한 과제가 ‘과제로서’ 인식되려면, ‘거짓말’을 둘러싼 형이상학적 사고의 모순과 공백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용서하다>와 <거짓말의 역사>는 데리다가 1997~1998년 여러 대학에서 한 강연에 토대를 뒀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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