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남·길로크 편저, 조형준 옮김/새물결·2만8000원 만약 발터 베냐민이 나치를 피해 도주하던 중 스페인에서 자살하지 않았다면? 그가 살아서 뉴욕에 도착해 이후 미완의 작업을 이어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러셀 킬번 캐나다 윌프리드로리에대학 교수(영어·영화학과)는 이런 가상의 역사를 상상해본다. 베냐민은 자살한 것처럼 꾸민 다음 위조된 신분증명서로 뉴욕으로 온다. 그는 미국에 사는 테오도르 아도르노, 에른스트 블로흐, 막스 호르크하이머 등 수많은 국외 추방된 친구들과 어떤 접촉도 하지 않는다. 대신 카프카의 소설 <아메리카> 주인공의 이름을 따 ‘칼 로즈먼’이란 가명으로 신문사 우편실에서 일하며 살아간다. 마치 유령처럼. 65살에 은퇴한 뒤에 그의 삶은 미완성작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속편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데 바쳐진다. 30년 뒤 (두번째로) 사망한 그의 원고는, 그가 베냐민임을 아는 유일한 지인에 의해 공립도서관에 유증된다. 세월이 지난 뒤 도서관에서 우연히 그 원고를 읽은 누군가가 진짜 저자를 알아챈다…. 베냐민이 ‘맨해튼 프로젝트’를 썼다면 어떤 내용일까. 그는 뉴욕이란 도시의 대필작가로 도시가 스스로 쓸 수 없는 자서전을 대신 썼을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와 달리 그의 주된 관심사는 도시를 변혁하기보단 훌륭한 늙은 철학자처럼 도시를 해석하는 것이다. 베냐민에게 ‘뉴욕의 세기’는 증기선 제너럴 슬로컴 호가 브롱크스 해변에서 침몰해 수많은 여성과 아이들이 죽은 비극이 일어난 날에 시작될 뿐이다. 본질적으로 현대적인 이 트라우마는, 증기엔진이란 진보의 기계가 대량파괴의 기계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세기를 예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단어로만 이루어진 사진앨범에 쉽게 비유될 수 있을 벤야민의 ‘맨해튼 프로젝트’는 본인의 삶과 비슷하게 성냥불꽃처럼 사라져가는 도시의 지나가는 삶을 구원하기 위한 그와 비슷한 시도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
로런스 스티븐 라우리의 <일하러 가다>(1943년).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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