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는 기적
김주영 지음/문학과지성사·1만원
원로 작가 김주영(
사진)의 짧은 소설 <아무도 모르는 기적>은 1950년대로 짐작되는 시대를 배경으로 설화적 이야기를 들려준다. 산골 마을 여덟살 소년 준호가 난생 처음 아버지를 따라 고개 넘어 장마당에 갔다 오는 과정이 소설을 이루는데, 아이의 눈에 비친 장터 풍경이 우선 인상적이다.
“(…)멧돼지 네 다리를 새끼로 꽁꽁 묶어 짊어지고 오는 사람, 잎담배를 겨드랑이에 끼고 오는 사람, 미역과 말린 가오리 짐을 지고 나타난 건어물 장수, 대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오는 아낙네, 땔나무 짐을 지고 나타난 늙은이, 돗자리를 어깨에 메고 팔러 오는 사내, 지게에 곡식 자루를 짊어지고 오는 사람, 강정이나 떡을 시루에 담아 이고 오는 아낙네,(…)”
아이의 눈에 비친 장터 풍경은 현란하고 무질서하다. 책으로 한쪽 반에 이르는 장꾼들 신분과 풍모 소개는 그들의 역동적인 언행 묘사로 이어진다.
“(…)엄살을 떨거나, 곡절 없이 패악을 부리거나, 입에 게거품을 물고 대들거나, 그런가 하면 넉살 좋게 웃거나, 멱살잡이한 채 담판을 짓거나, (…) 삿대질을 하거나, 더럽거나, 보기 민망하거나, 보기에 흉하거나(…)”
<아무도 모르는 기적> 삽화. 그림 이명애, 문학과지성사 제공
열거와 누적을 통해 장터 풍경을 묘사하는 수법은 화가의 거듭된 붓질을 연상케 한다. 일찍이 청송 진보 장거리를 뛰놀며 성장했고 작가가 된 뒤에도 소설 <객주> 취재 등을 위해 전국 각지의 시장을 답사한 김주영의 경력과 내공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읍내 시장에 간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새 고무신을 사 신기는데, 아들은 제 신발 못지 않게 닳고 해진 어머니의 신발이 눈에 밟힌다. 신발 좌판 주인이 조는 틈에 제 신발과 어머니 신발을 바꿔치기 한다는 게 그만 어머니 신발만 도둑질한 셈이 됐고, 설상가상으로 그 과정에서 아비를 놓치는 바람에 크고 낯선 장터에서 미아가 되고 만다.
결국 아비를 찾지 못하고 홀로 트럭에 올라 낯선 어른들과 함께 집으로 향하는데, 여기서부터 소설 후반부는 크게 요동치며 색깔을 달리하게 된다. 어둠 속에 고개를 넘던 트럭 앞에 웬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고, 트럭 위 승객들이 호식(虎食)을 피하고자 꾀를 내고 의논을 하는 과정에서 인간성의 추한 바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야바위꾼과 가짜 약장수, 돌팔이 발치사(拔齒師), 생선 장수, 타짜꾼, ‘넥타이’ 등이 서로를 탓하며 나 아닌 남이 호환(虎患)의 희생양이 되기를 바라다가 급기야는 어린 준호를 호랑이 밥 삼기로 한다.
어리고 무력한 소년을 호랑이 아가리 앞에 떨군 비겁한 어른들이 트럭을 몰아 고개 아래로 달려 내려가는 데에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뒤에 이어진 상황 전개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소설 제목 ‘아무도 모르는 기적’에서 보듯, 도망친 어른들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난 것. 이 소설의 설화적 성격도 이런 뜻밖의 결말에서 비롯되는 셈이다. 순진무구한 아이를 주인공으로 삼았고 친근한 삽화도 곁들였지만, 팔순 작가의 경륜과 지혜가 압축적으로 담긴 소품이다.
글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