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지음/생각정원·1만7000원 1991년 알프스산에서 신석기시대 사람의 시체가 발견돼 세계가 떠들썩했다. 발견 장소가 외치 계곡의 얼음이었기 때문에, 그는 ‘아이스맨’, ‘외치’라는 별명을 얻었다. 현대의 학자들이 엑스레이와 컴퓨터 단층촬영(CT) 등으로 외치를 들여다보니, 그는 퇴행성관절염, 확장성 심근병증 등을 앓고 있었다. 모두 외치가 살던 시대의 의학 수준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었다. 하지만 외치가 아픔을 그저 참고만 지낸 건 아니다. 그는 당대의 의사를 찾아가 병을 고치려 했던 듯하다. 증거는 외치의 피부 곳곳에 새겨진 문신이다. 문신의 위치는 엑스레이에서 관찰된 손상부위와 엇비슷했다. 비록 치료법이 틀리긴 했지만, 아픈 사람을 낫게 하려는 의학적 행위는 5300년 전 인류의 역사에서도 존재했다는 의미다. 여기서 질문. 외치의 병은 어느 시대에 이르러야 확장성 심근병증이라는 ‘진단’을 받을 수 있을까? 또 어느 시대부터 이 병에 유효한 ‘치료’가 가능했을까? <서민 교수의 의학 세계사>는 아이스맨 외치가 외계인이 제공한 타임머신을 이용해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을 그렸다. 외치의 시간여행에 동행한 독자에게는, 문신이나 주술을 이용하던 의학이 ‘과학’으로 자리 잡는 세계사의 결정적 장면들이 생생히 펼쳐진다. 지은이는 “의학의 발전만큼 세계사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학문도 없다”고 말한다. 책이 의학의 역사를 씨줄로, 세계사를 날줄로 직조된 이유다. ”의학은 실험실 속에서 천재적인 과학자들이 이끌어간 것 같지만, 오히려 서로 다른 문명이 만나거나 사회가 변동할 때 더 많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원주민과 신항로 개척자들의 싸움, 2차 세계대전 등 “서로 다른 문명이 만나거나 사회가 요동칠 때 의학은 작든 크든 세계사의 흐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예컨대 외치는 ‘질병=신이 내린 징벌’로 여기던 고대에, ‘모든 질병에는 (신이 아닌 다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 히포크라테스를 만난다. ‘임상의학의 창시자’라고 할 만한 그는 진료를 보며 알게 된 지식을 기록으로 남겼고, 이 기록은 아랍과 유럽으로 넘어간다. 외치는 교회의 권위를 추락시켜 르네상스를 앞당긴 흑사병도 목도한다.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한 근대 영국 런던에서 상하수도 시스템의 부재로 콜레라가 전파됨을 관찰·기록한 존 스노와 대화한다. 의학의 역사를 아는 일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대한민국 상위 0.1% 상류층들은 자녀를 우리나라 최고의 의과대학에 합격시키고자 물불 가리지 않는다. 대학 입시의 최고봉이 ‘의대’라는 현실과 책이 전하는 의학의 본질 사이에는 꽤 거리감이 느껴진다. 지은이는 의학의 과거 속에서 의학의 미래도 엿볼 수 있다고 본다. 인공지능이 의사를 대체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 의사만이 환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방법을 찾느라 고뇌하기 때문이다. 책에 서술된 의학사 곳곳에는 당대의 무력함을 물리치고 진실에 기반해 환자를 살리려는 의료인들의 분투가 두드러진다. 책은 드라마 <스카이캐슬> 수준의 긴장감은 없지만, 계속해서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서민적 글쓰기’의 매력으로 가득하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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