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교양 이데올로기와 비전
이광주 지음/길·2만8000원
과연 근대화 과정에서 독일은 유럽의 다른 지역들과는 구분되는, 독일만의 ‘특수한 길’(sonderweg·존더베크)을 걸었는가? 오랫동안 역사가들을 고민케 하고 서로 논쟁하게 만들었던 질문이다.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하는 ‘독일의 길’을 따라가다보면, 그 끄트머리에서 히틀러와 나치를 만나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국의 지성사 전문 저널리스트 피터 왓슨은 <저먼 지니어스>(글항아리)에서 히틀러와 나치의 기억 때문에 ‘독일산 천재’들의 창조적 업적까지 도매금으로 넘겨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독일이 따르지 못한 유럽의 ‘보편적’ 근대화 과정이 있다고 전제하는 것 자체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높다. 다만 어떤 결론으로 향해 가든, 내향성이나 교양(Bildung) 등 부인할 수 없는 독일 정신문화의 독특한 특징들은 여전히 중요한 연구 대상이다.
유럽 지성사를 천착해온 서양사학자 이광주 인제대 명예교수. 길 제공
<독일 교양 이데올로기와 비전>은 한평생 유럽 지성사·문화사를 천착해온 서양사학자 이광주(90) 인제대 명예교수의 새 책이다. 전공 분야 저술로는 마지막이 될 이 책에서, 노학자는 지난 60년 동안 펼친 자신의 연구들을 차분하게 집대성했다. 기본적으로 지은이는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구분되는 ‘독일의 길’이 있었다고 보며, 무엇보다 그 특징을 독일적 ‘교양’에 근거한 이데올로기와 비전에서 찾는다. “비정치적·반사회적 학식자 집단의 성격이 짙은 체제 지향적 ‘교양인’(Gebildete) 계층”의 존재를 ‘독일의 길’의 핵심으로 지목한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16세기 국왕의 절대주의 내지 국가의 중앙집권화가 진행되면서 신분제가 서서히 해체됐고, 부르주아의 출현으로 시민공동체로서 도시가 활성화됐다. 그러나 ‘제국’이란 이름을 달고도 단일국가라기보다는 크고작은 영방(領邦)국가들의 연합체적 성격이 강했던 독일에서는 19세기까지도 신분제가 존속하는 등 중세적 개념을 쉽게 떨쳐내지 못했다. 때문에 다른 유럽 지역과 달리 독일의 ‘시민사회’는 부유한 상인계층이 아니라 “관료, 법조인, 대학교수를 비롯한 교사와 목사 등 전문직”이 주축을 이뤘는데, “중산층 출신이면서도 사회적·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이들은 대체로 국가기관에 예속되어 체제 지향적인 속성을 지녔다.”
종교개혁의 출발점인 마르틴 루터의 초상(1528, 루카스 크라나흐). 토마스 만은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와 ‘종교주의자’ 루터를 대비하며, 반정치적·반문명적인 정신지상주의를 쫓게 된 ’독일 문제’의 중심에 언제나 루터가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지은이는 애초 유럽적 정신문화의 전통에서 ‘교양’이란 개인으로서 자신을 돌보는 것뿐 아니라 사회에 대한 헌신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독일어로 ‘인간성’을 의미하는 ‘Menschlichkeit’는 라틴어 계통의 ‘humanite’와 달리,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사회적·집단적 의미를 내포하지 않았고 어쩌다 부차적 의미로서만 사회성을 표현했다.” 여기에는 루터가 세운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국가들처럼 시민사회 전체에 뿌리박은 정신문화로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았다는 분석이다. 독일 정신문화를 비판한 토마스 만은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와 ‘종교주의자’ 루터를 비교했는데, 만은 “루터가 개인의 내면, 특히 믿음을 중심에 놓은 프로테스탄티즘이 독일적 ‘교양’을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성격으로 고착시키고, 이것이 다른 서유럽이루고자 한 그리스도 교도의 자유를 개인의 자유, 인격적·시민적 자유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봤다.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2세의 초상(1870, 빌헬름 캄프하우젠). 계몽사상에 매료된 프리드리히 2세는 ‘국가의 제1공복’을 자처하며 다방면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그의 사전에는 계몽사상의 본질인 ‘자유로운 인간’ 대신 ‘강한 의무감과 국가의식’만이 있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런 독일적 ‘교양’의 토대를 쌓는 데 공헌한 주요 인물로는 프로이센 국왕으로 ‘계몽절대군주’라 불린 프리드리히 2세, 그리고 근대 대학의 이념을 세운 빌헬름 폰 훔볼트를 들 수 있다. 18세기 유럽이 계몽사상으로 들끓을 때, 프리드리히 2세는 “종교와 신앙의 이름 아래 교육을, 특히 민중을 위한 국민교육을 장려했다.” 그러나 그 본질에는 계몽사상의 핵심인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강한 의무감과 국가의식’이 들어 있었다. 다른 한편, 국가와 학문(대학)의 관계를 이분법적 대립구도로 파악했던 훔볼트는 대학이라는 제도를 중심으로 삼아 ‘학문을 통한 교양’과 ‘학문의 자유’를 주창했다. 그러나 이렇게 제도화된 대학 체제 아래에서 학력을 갖춘 전문직이 곧바로 ‘교양 시민층’이 되고, 그 대다수는 관료집단이 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서유럽의 부르주아와는 달리, 이들은 ‘정신의 귀족’을 자처하며 권력의 편에 서는 것으로써 “신분과 지위의 안정과 보장을 확보하려 했다.”
이들 독일의 교양계층에게 계몽사상은 결국 “18세기의 지적 유행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프랑스 혁명에 잠시 열광했던 이들은, 루이 16세의 처형을 계기로 “반사회적 혁명관”으로 집단적으로 ‘전향’한다. 독일 정신문화에서 압도적 존재감을 과시하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괴테는 “거대한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폭력과 지속 두 가지의 길만 있다”고 할 정도로 프랑스 혁명이 지닌 세계사적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괴테는 애초부터 “그 길이 자기의 길이 아님을 명시했다.” ‘정신의 귀족’이었던 교양주의자 괴테에게, “정치란 교양 세계와 대극을 이루는 것, 즉 반문화적·반개인적·대중적인 것을 의미했다.”
근대 독일 교육체제를 확립한 사상가 빌헬름 폰 훔볼트의 동상. 독일 베를린에 있는 훔볼트대학에 위치하고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괴테뿐 아니라 실러, 독일 낭만주의, 뒤러와 바그너, 역사학자 랑케와 그가 정초한 독일 내셔널리즘 등 온갖 정신문화의 흐름을 훑어내려가는 지은이는, 마지막 대목에서 역사학자 프리드리히 마이네케와 작가 토마스 만에게 가 닿는다. 둘 다 독일 근대사가 밟아온 경로가 시민계급의 정신적 구조의 결함에서 비롯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지난날의 자신과 정직하게 대면하고 가혹하게 결별하는 것만이 새로운 출발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 주창한 인물들이다. 한때 자신도 궁극적인 내면성을 추구하는 ‘독일적인 것’에 매료된 바 있다고 고백하는 노학자는 이렇게 명토박아 둔다. “자유는, 개인적이면서 그만큼 진정으로 사회적인 자유는 현실과 맞선 슬기로운 정치적 사유와 실천에서 싹트고 발전한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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