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중국의 사상적 곤경허자오톈 지음, 임우경 옮김/창비·2만5000원
오늘날 중국은 지구에 존재하는 그 어떤 자본주의 국가보다도 물질만능주의가 횡행하는 곳으로 손꼽힌다. 출세와 실리가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반면 윤리나 도덕 따위는 구닥다리로 전락했다. 전통 시대에는 깊은 정신문화가 발달했고, 근현대에는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높은 이상까지 실현했던 중국 사회는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역동적인 근현대사 속에서 중국은 끊임없는 사상 논쟁으로 자신을 단련해왔다. 1920년대 ‘신문화운동’은 근대적 사상 논쟁의 문을 처음 열었고, 그 뒤 혁명과 건국 과정, 개혁·개방 등 현대 중국의 주요한 발자취 뒤에는 어김없이 치열한 사상 논쟁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과연 그 논쟁들은 중국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충분한 연구와 성찰에 바탕을 두고 펼쳐졌던가?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이끈 계기인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당시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최근 국내 출간된 <현대 중국의 사상적 곤경>(원제는 ‘당대 중국의 사상 무의식’)은 이런 물음을 던진다. 현대 중국의 사상 논쟁 자체를 반성적으로 성찰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지은이는 허자오톈(賀照田·51)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연구원으로, 국내 독자들과 이번 책으로 처음 만나게 됐다.
책은 그동안 주류 담론이 주목하지 않았던 여러 사상 논쟁의 핵심을 새롭게 지목하고 한발짝 더 들어가는 방식으로 현대 중국의 정신사적 궤적을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1980년대 초반 중국을 달구었던 ‘판샤오’ 논쟁 분석이 대표적이다. 지은이는 이것이 현대 중국을 강력하게 규정해온 문화대혁명(문혁) 시기와 문혁의 유산을 청산한 뒤의 시기(신시기)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본다. ‘판샤오’ 논쟁은 1980년 잡지사 <중국청년>이 ‘판샤오’란 필명을 쓰는 한 스물셋 젊은이의 편지를 소개하면서 불거졌다. 문혁이 고취한 이상주의에 기대어 자라온 이 청년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현실들을 겪은 뒤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된 좌절과 허무를 토로했다. “주관은 자아를 위하고 객관은 타인을 위한다”, “시대의 든든한 어깨가 만져지지 않는다” 등 판샤오의 글은 당시 청년 세대의 공감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80년 ‘판샤오’ 논쟁을 촉발한 편지를 쓴 당사자 가운데 한 명인 황샤오쥐의 최근 모습. 출처 china.com
그러나 지은이는 당시 중국이 판샤오 논쟁의 진정한 의미를 전혀 잡아내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당시 주류 담론은 “판샤오의 문제는 문혁의 오류 때문에 형성된 것인데, 이미 문혁의 오류를 바로잡았으니 문제의 현실적 기초가 사라진 셈이다. 그러니 앞으로 올바른 시대적 기획에 열정적으로 뛰어들면 된다”는 식의 처방을 내놨다. 문혁의 이상주의와 극단적인 집단주의에 대한 반발로, ‘인간’을 앞세우는 새로운 기획이 모습을 드러내던 시기였다. 이 ‘신계몽’ 사조는, 개인들이 ‘자아를 위해’ 살면 경제발전이라는 ‘객관적’ 목표를 이루게 될 것이라는 ‘개혁’ 담론으로도 이어진다. 80년대 이후 현대 중국이 걷게 될 길이 이미 판샤오 논쟁에 담겨 있었던 셈이다.
문제는 신계몽 사조가 관념적으로만 인간을 앞세웠을 뿐, 실제 ‘역사-구조’로서 현실을 사는 인간은 제대로 보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지은이는 판샤오의 편지에서 현실에 대한 절망과 허무뿐 아니라 “절절한 이상주의적 충동과 의미감에 대한 강렬한 갈망”도 함께 읽는다. 이는 “혁명과 사회주의 실천이 문혁 후의 중국에 남겨준 가장 소중한 유산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신계몽 사조는 이러한 정신사적 상황에 대한 충분한 성찰 없이, 협애한 경제주의적·물질주의적 단정 속에 갇혀 ‘실익이 가장 중요하다’는 식의 사회적 인식과 심리를 만들어가는 데 몰두했다. 그 결과 “시장이데올로기와 소비주의에 균형을 부여하기 위해 이상주의를 가장 필요로 하던 90년대에 정작 과거의 이상주의는 이미 무너진 채 힘을 쓰지 못했다.”
1990년 아시안게임을 앞둔 중국의 수도 베이징의 거리 모습. 출처 dwnews.com
80년대를 풍미한 리쩌허우(李澤厚)의 글 ‘계몽과 구국의 이중변주’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대목은, 중국 현대의 정신사를 다루는 지은이의 큰 틀을 잘 보여준다. 문혁의 봉건적 성격을 지적하는 것이 당대 지식계의 유행이었고, 리쩌허우 역시 “구국이 계몽을 압도함에 따라 계몽이 주변화되어 그 임무를 완성하지 못했다”고 봤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중국에 남아있던 봉건성 때문에 문혁과 같은 일이 발생한 것이니 계몽이야말로 지금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것이다. 리쩌허우의 이 글은 신계몽주의의 핵심을 잘 드러냈고, 더 나아가 앞으로 찾아올 개혁·개방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지은이는 리쩌허우의 글에서 “계몽의 세례를 충분히 받아 ‘근대인’이 된 사람들의 민주만이 진정 이상적이고 신뢰할 만하다는 전제”가 있다는 구조적 결함을 발견한다. 이런 “특별한 우월감과 우위감”을 가지고 있던 계몽 지식인들이, 현실의 다수 대중으로부터 “어떤 자원을 모색”하는 노력을 기울였을 리 만무했다. 이들의 “중국사회와 관련된 이해와 감각은 이미 사회적 사실에 대한 진지한 분석이나 파악과는 거의 무관한 것이었다.”
1989년 후야오방의 사망을 계기로 천안문 광장에 모여든 중국 인민들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중국혁명의 전통을 되새겨본다면, 이는 더욱 안타까운 일이 된다. 신문화운동의 다른 흐름과는 다르게, 무산계급으로부터 자신의 혁명성을 찾았던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일방적인 계몽관계가 아니라 쌍방향적이고 변증법적인 계몽관계”를 만드는 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근대적 공업화 과정이 없던 중국에서 공산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열쇠였다. 머리말을 쓴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는 “시장경제로의 전환과 세계경제 참여가 이러한 (사회주의) 실천이 현대 중국 내부에 기입한 함의를 무화할 수 있다는 인식은 몰역사적”이라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지은이는 문혁 이후 신시기에 벌어진 중국의 사상 논쟁들이 대체로 ‘이론의 투명성’에 갇혀 있다고 비판한다. 지식인들이 투명하게 손에 잡히는 개념과 명제만을 가지고 이론을 먼저 만들어낸 뒤, 그 위에 현실을 덧씌우고 있다는 것이다. 90년대~2000년대 개혁·개방 이후 급격히 커진 중국의 빈부 격차를 두고 벌어진, 이른바 ‘자유주의-신좌파’ 논쟁을 그런 오류의 사례로 들기도 한다.
중국의 정신사적 상황을 주로 연구해온 허자오톈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 출처 소후닷컴
일각에서는 빈부 격차의 원인을 ‘신자유주의’에서 찾았지만, 그것만 가지고선 향촌지역의 문제 등 다양하고 복잡한 현실을 설명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지식인이라면, 응당 운명처럼 주어진 ‘이론의 불투명성’을 헤쳐가야 한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부박한 진영논리나 자기완성적인 담론 구조에 매달려 ‘역사-구조’로서의 현실을 천착하지 않는 중국의 지식인들뿐 아니라, 이와 크게 다를 바 없을 한국의 지식인들도 마땅히 귀 기울여야 할 지적이다.
‘안정적 발전’에 포섭된 중국의 자유주의
<현대 중국의 사상적 곤경>에서 특히 눈에 띄는 대목 가운데 하나는, 개혁·개방 이후 ‘자유주의-신좌파’ 논쟁을 분석한 제4장 ‘중국 당대 사상논쟁의 역사적 품격과 지식적 품격’이다. 이 글에서 허자오톈은 우리에게도 꽤 알려진 ‘자유주의-신좌파’의 대립구도 자체가 사실 부정확한 설정이며, 단순한 프레임에 매달린 논쟁 자체가 “중국 현실 자체를 누락해버렸다”고 비판한다.
“1989년 민주운동의 실패와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전방위적으로 전개된 경제개혁은 90년대 초중반 중국대륙 지식계를 구축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사건이었다.” 여기서 현대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 가운데 하나가 나온다. 당시 ‘반독재’를 추구해온 자유주의 진영이, ‘천안문 사태’로 인해 제기된 합법성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 국가가 제시한 경제발전의 길과 공명하게 된 것이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은 어떻게 가능했던가?
지은이는 국가가 제시한 ‘안정적 발전’이라는 담론이 그 둘 사이의 논리적 접점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과거의 급진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한 자유주의는, 충분한 역사적 성찰 없이 “너무나 성급하게 혁명에 대한 비판과 반대를 자기 사상과 논술의 중심으로 삼는 교조적 사조로 경직되어 버렸다.” 때문에 반급진주의의 구미에 맞는 ‘안정적 발전’ 담론이 시장에 대해 막연한 환상만을 갖고 있던 자유주의 진영의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역사적 면모를 변화시킬 핵심 역량으로 기대되었던 시장적 실천들은 자유주의의 정치·사회·문화·가치 규범에 제한되거나 비평받지 않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자유주의는 스스로 현실에 개입할 능력을 잃어버린 셈이다.
자유주의 진영에 의해 ‘신좌파’라는 이미지를 뒤집어쓰게 된 지식인들 역시, 사실상 그 논지에서 자유주의와 배리되지 않는다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예컨대 왕샤오광, 추이즈위안, 간양 등은 자유주의가 스스로 세워둔 울타리를 허물고 그것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줄 지식인들이었지만, 주류 사상계는 그들을 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신좌파’로 몰아 불필요하고 부박한 논쟁만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 일각에서는 중국의 사회적 위기를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결과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는데, 지은이는 이 역시 ‘이론의 투명성’에만 매달려 현실 정합성을 잃은 진단이라고 지적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