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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부자들 상속이 불평등의 뿌리다

등록 2018-12-14 06:01수정 2018-12-14 19:48

백승종 교수, 상속제 비교사적 접근
“불평등·양극화 역사적 조망하려 해”
상속제 따라 사회의 부 향방 결정돼
“불평등함 인식 자체가 새로운 현상”
상속의 역사-상속제도는 어떻게 세상을 움직이는가
백승종 지음/사우·1만6000원

1996년 12월3일 삼성에버랜드(당시 중앙개발) 전환사채 청약 마감일, 에버랜드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아들 이재용과 세 딸 이부진·이서현·이윤형(2005년 사망)에게 전환사채 96억6181만원어치를 배정했다. 에버랜드 주식은 낮잡아도 8만5천원에 거래됐는데 전환사채를 주식 전환가격 7700원에 발행했었다. 인수하면 대박이었는데도 제일제당을 제외한 이 회장 및 삼성 계열사들은 실권했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이재용은 48억3091만원, 이부진·이서현·이윤형은 16억1030만원어치씩을 배정받았다. 이 수치를 보자. 아들 한명한테 배정된 몫이 세 딸의 몫을 합친 것과 같다. 상속이 어떻게 될 것인지 예고한 셈이다. 이재용이 최대 주주가 된 에버랜드는 삼성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다. 회사 이름이 제일모직으로 바뀌고, 삼성물산과 합병돼 삼성물산으로 바뀌었다. 최근 터진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도 이 과정에서 빚어진 일이다.

이재용과 여동생들 사이에선 마찰음이 나오지 않았는데, 윗대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012년 삼성의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의 맏아들 이맹희(2015년 사망) 씨제이(CJ)그룹 명예회장과 셋째아들 이건희 회장 사이에 유산상속 소송이 벌어졌다. 이맹희 회장은 “건희가 어린애 같은 발언을 하는 것을 듣고 몹시 당황했다. 형제지간에 불화만 가중시켜왔고 늘 자기 욕심만 챙겨왔다”고 비난했다. 이건희 회장은 “자기 입으로는 장손이다 장남이다 이러지만 나를 포함해서 누구도 장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고… 이맹희씨는 감히 나보고 ‘건희, 건희’ 할 상대가 안 된다”고 맞받았다.

이재용(50) 삼성전자 부회장으로 삼성그룹 지배권을 넘기는 상속 작업은 20여년 전부터 편법·불법 논란을 불렀다.
이재용(50) 삼성전자 부회장으로 삼성그룹 지배권을 넘기는 상속 작업은 20여년 전부터 편법·불법 논란을 불렀다.
상속을 둘러싼 이전투구는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부자가 되기 가장 쉬운 길이 상속이고, 다른 방식으론 부자 되기가 어려운 탓이다. “경제가 큰 폭으로 격동하는 시기에도 개인이 부자가 되는 데 상속만큼 결정적인 요소는 없다.” <상속의 역사>를 펴낸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학 대우교수는 “부자들은 막대한 재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준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기원은 바로 그것이다”라며 ”악화하는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 문제를 역사적으로 조망하기 위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상속제도에 따라 부의 향방이 결정됐고 사회도 바뀌었다. 역으로, 경제·문화적 여건의 변화는 상속제를 변화시켰다. 지은이는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비교사적 방법으로 상속제를 둘러싼 사회현상과 의미를 살핀다.

중세 유럽에서는 부모자식 간에 구두로, 18~19세기에는 문서로 부양계약서를 썼다. “너는 나에게 우유를 공급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내 재산이 네게 상속될 것이다.” 도시 중산층은 유언장에 버터와 치즈는 얼마만큼 제공할지, 고기요리는 한 달에 몇 번이나 식탁에 올릴지를 미리 정해뒀다. 농촌은 ‘은퇴계약서’를 작성했다. 상속은 노후를 보장받기 위한 수단이었다. 제대로 부양하지 않으면 상속권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기도 했다. 계약서는 20세기 연금제도가 도입되며 사라졌다.

요즘은 한국에서 ‘효도계약서’를 쓴다. 과거에는 상상도 못한 일이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한국, 중국, 일본에서 ‘효도’는 의무였던 탓이다. 불효자는 마을에서 멍석말이를 당했다. 거세당한 환관이 상속을 고민한 일은 이 땅에만 있던 특이한 모습이었다. 중국 등과 달리 결혼하고 가정도 이룰 수 있었다. 조선 정조 때는 환관들의 족보인 <양세계보>가 편찬됐다. 환관은 제삿상을 받지 못할까봐 일찌감치 어린이를 입양해 환관으로 키워 대를 잇고 재산도 상속했다. 다른 나라에선 환관 가문 자체가 없었다.

상속은 ‘가문의 생존전략’이었다. 17~19세기 유럽에서 재산을 상속받지 못한 지주의 자녀들도 소작농으로 추락했다. 상속자는 형제자매의 자녀들, 즉 조카들의 ‘대부’가 돼 이들을 돌봤다. 기독교의 대부-대자 시스템을 활용한 것이다. 상속제가 사회변화를 자극하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에는 상속에서 배제된 둘째, 셋째 아들이 많이 가담했다. 독일 슈바벤 지역은 ‘균분상속제’가 시행돼 자녀들에게 계속 고루 나누다 보니 모두 빈곤해졌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가내수공업을 했다. 독일 중소기업들이 등장한 배경이다.

“‘서자’가 아니었더라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중산층의 일원으로 지주가 돼 부를 누렸을 것이다. 천재화가로 이름을 떨치게 된 배경에는 서자 출신이라는 운명의 장난이 한몫을 했다.” ‘서자’는 상속에서 배제되거나 차별을 받았다. <경국대전>에는 양인 신분의 첩이 낳은 서자는 ‘적자’의 7분의 1만 받도록 하고 있다. 중세 피렌체의 최고 가문 메디치는 상속자가 될 수 없는 서자들과 둘째 아들 등을 성직자로 만들었다. 메디치가의 유명 성직자들은 이렇게 나왔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잦은 근친혼으로 ‘합스부르크 기형’까지 나타났다. “근친혼의 목적은 뚜렷했다. 해당 가문이 소유한 유형의 재산과 정치·사회적 자산을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결혼할 때 여성의 지참금은 딸에게 주는 일종의 상속이었다. 지참금이 여성의 이혼을 가로막았다. 남성은 재산을 돌려주고 싶지 않았다. 일처다부제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높았을까? 백 교수는 “아니다”라고 답한다. 형제들이 한 여성과 결혼하는 형제일처의 관습이 인도 북부 등지에 있는데, 물려받은 재산이 얼마 안 되는 형제들이 재산을 공유하는 것처럼 여성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전기까지는 여성이 재산을 자기 이름으로 소유하고, 자기 뜻대로 물려주거나 팔 수 있었다. 16세기 후반부터 상속에서 점점 배제됐다. 법적으로 한국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상속권을 인정받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20년이 넘는 삼성그룹 상속 과정에서 보듯 재벌은 온갖 수단으로 부를 대물림하려 한다. 경제 정의는 실종됐다. 그럼에도 “희망의 싹”은 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는 ‘금수저’의 대물림을 비판의 도마 위에 올리곤 한다. 안타깝게도 부와 가난의 대물림은 유사 이래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온 오랜 관습이다. 지금 우리가 금수저의 불평등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실은 새로운 현상이다.” 사회 정의에 대한 목마름으로 길을 내보자는 얘기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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