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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우리 뇌는 텅 빈 상태를 열망한다

등록 2018-12-07 06:00수정 2018-12-08 17:15

독일 출신 뇌과학자와 과학 저널리스트
뇌과학으로 텅 빈 상태 실체·의미 고찰
“인간은 자아가 지나치게 형성된 존재”
텅 빈 상태가 자유로운 시각을 주기도

머리를 비우는 뇌과학-너무 많은 생각이 당신을 망가뜨린다
닐스 비르바우머·외르크 치틀라우 지음, 오공훈 옮김/메디치·1만7000원

2014년 미국 버지니아대학의 티머시 윌슨 연구팀은 400여명의 피실험자들을 대상으로 텅 빈 공간에서 딱 15분 동안 자리에 앉아 생각을 하도록 하는 실험을 했다. 그랬더니 10명 가운데 9명이 정신적 불안증을 내보였고, 절반 가까이가 견뎌내기 힘들다고 호소했다. 윌슨은 여기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보탰다. 피실험자들에게 스스로에게 전기충격을 가하는 조그만 버튼 하나를 제공한 것이다. 9볼트의 전기충격이라, 고통을 가하진 않지만 살짝 불쾌감을 주는 정도였다. 결과는 어땠을까? 놀랍게도 실험에 참여한 남성 가운데 3분의 2가, 여성의 경우에는 4분의 1이 이 버튼을 최소 한 번은 눌렀다. 무려 190번이나 누른 사람도 있었다.

이 실험은 인간이 일상에서 ‘텅 빈 상태’를 얼마나 못 견뎌하는지 잘 보여준다. 스마트폰, 뉴미디어가 그렇게 만든 것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미 1950년대에 감각을 박탈하면 피실험자가 하루도 견디지 못한다는 도널드 헵의 실험 결과가 있었다. 이에 대해 독일 출신 뇌과학자 닐스 비르바우머는 ‘인간의 뇌가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다’고 지적한다. “뇌의 본질은 ‘어떤 효과에 도달하려는 데’ 있다.” 여러가지 선택이 주어졌을 때 뇌는 그 중에서 가장 긍정적인 효과를 줄 만한 것을 선택하는데, “자연은 이 뇌 영역(‘긍정적인 보상 중추’)을 지칠 줄 모르고 밤낮으로 일하는 생각 펌프로 창조했다.” 그러니 만약 텅 빈 상태만이 유일한 대안으로 주어진다면, 아무 효과를 얻지 못하는 상황보다는 자신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일지라도 자극을 선택하게 된다는 얘기다.

뇌과학은 뇌의 잠재된 기능을 찾아내는 데 주로 집중해왔다. 그러나 독일 출신의 뇌과학자 닐스 비르바우머는 ‘텅 빈 상태’를 지향하는 뇌의 메커니즘이 무엇인지 파헤쳤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뇌과학은 뇌의 잠재된 기능을 찾아내는 데 주로 집중해왔다. 그러나 독일 출신의 뇌과학자 닐스 비르바우머는 ‘텅 빈 상태’를 지향하는 뇌의 메커니즘이 무엇인지 파헤쳤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뇌의 이러한 본질은, 역설적이게도 그 정반대에 위치한 ‘텅 빈 상태’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비르바우머가 저널리스트인 외르크 치틀라우와 함께 쓴 책 <머리를 비우는 뇌과학>(영어 제목은 'Thinking is overrated')은 뇌과학의 입장에서 텅 빈 상태의 실체와 의미를 고찰한 책이다. 뇌의 ‘무궁무진한 능력’을 밝혀내는 데 집중해온 최근 뇌과학 연구의 흐름에 비춰보면, 텅 빈 상태에 대한 지은이들의 이런 접근은 신선하고 논쟁적이다.

책은 “우리 뇌는 텅 빈 상태를 원하고 있다”고 말한다. 텅 빈 상태가 과연 무엇인지, 지은이들조차 “정의내리기 어렵다”며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책 속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서술들을 종합해보면, 일단 텅 빈 상태는 뇌의 ‘방어체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우리 뇌는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감지하고 경보를 울리는 등 다양한 상호협력 시스템을 방어체계로 구축해놓고 있다. “텅 빈 상태는 이 방어체계가 평온한 상태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방어체계가 끊임없이 가동되기만 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비상사태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뇌는 텅 빈 상태를 열망하게 된다. 한마디로 ‘두꺼비집’을 내리듯 뇌를 비우려 한다는 것이다. ‘의식으로 향하는 문’인 시상과 여기에 속한 신경전달물질 및 뉴런이 이런 ‘두꺼비집’ 구실을 한다.

독일 출신의 뇌과학자 닐스 비르바우머. 출처 스위스 바이스센터 누리집
독일 출신의 뇌과학자 닐스 비르바우머. 출처 스위스 바이스센터 누리집
텅 빈 상태는 단지 방어체계에 쉼표를 찍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자극과 감각을 만들어주는 구실도 한다. 명상을 통해 새로운 인식에 도달한다거나, 스포츠나 악기 연주에서 자신을 잊는 상태로 접어드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를 두고 지은이들은 “텅 빈 상태는 자유로운 시각을 선사한다”고 말한다. 특히 주목할 것은, 텅 빈 상태에서는 ‘자기수용성 감각’, 곧 외부 세계와 나 자신을 구분짓고 ‘우리 자신이라는 모델’을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는 감각이 눈에 띄게 잦아드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텅 빈 상태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과 외부 세계의 경계를 짓는 감각을 약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이는 텅 빈 상태를 추구했던 동서고금 철학자들의 깨달음, 그리고 지은이들이 ‘텅 빈 상태의 진화론적 의미’라고 풀이하는 대목과도 맞물린다. “인간은 자아가 지나치게 형성된 존재다. 하지만 자신의 종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선, 자아라는 고치에서 빠져나와 다른 사람과 하나로 융합해야 한다.” 이때 ‘나’에서 벗어나 ‘우리’가 되려면, 자아가 사라지는 것이 긍정적이라고 느끼는 순간, 곧 무아지경의 텅 빈 상태에 이르는 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지은이들은 거창한 의미 부여보다는 냉정한 현실 분석에 더 뛰어난 과학자들이다. 텅 빈 상태는 단지 삶에 대한 고민에 빠져든 수도승이 구도를 통해 얻은 결과물이 아니다. 시종일관 뇌를 둘러싼 현상적 관찰에 집중하는 지은이들은, 텅 빈 상태는 휴식이나 수면을 통해서 만날 수도 있지만, 명상이나 섹스, 스카이다이빙, 일정한 리듬을 가진 재즈 연주, 감각을 박탈한 채 욕조에 둥둥 떠다니게 해주는 ‘플로팅 탱크’, 발을 척척 맞추는 군사 퍼레이드, 심지어 뇌전증 발작을 통해서도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감각을 차단하여 ‘텅 빈 상태’에 가깝게 만들어주는 부유탱크(floating tank)의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감각을 차단하여 ‘텅 빈 상태’에 가깝게 만들어주는 부유탱크(floating tank)의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가장 인상적이고 논쟁적인 대목은, 루게릭병 등에 걸려 뇌는 기능하지만 몸을 아예 움직일 수 없는 ‘감금증후군’ 환자들의 사례다. 지은이들은 환자의 뇌에 측정 칩을 장착해 뇌파와 혈류의 변화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수 있게 했다. 비자발적으로 ‘텅 빈 상태’에 놓였다고 할 수 있을 이들의 마음은 과연 어땠을까? 지은이들은 그들에게서 우울증과 체념의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른바 ‘삶의 질’이 비환자들에 견줘 더 높았으며, 감금 상태의 단계가 심각할수록 더 긍정적이었다고도 소개한다.

뇌컴퓨터 시스템을 써서 루게릭병과 같은 ‘감금증후군’(뇌의 기능은 살아 있지만 신체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 환자들과 의사소통을 해본 결과, 감금 상태의 단계가 심각할수록 삶의 질을 묻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스위스 바이스센터에서 개발한 뇌컴퓨터 시스템의 모습. 출처 스위스 바이스센터 누리집
뇌컴퓨터 시스템을 써서 루게릭병과 같은 ‘감금증후군’(뇌의 기능은 살아 있지만 신체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 환자들과 의사소통을 해본 결과, 감금 상태의 단계가 심각할수록 삶의 질을 묻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스위스 바이스센터에서 개발한 뇌컴퓨터 시스템의 모습. 출처 스위스 바이스센터 누리집
왜 그런가? 지은이들은 ‘어떤 효과에 도달하려 한다’는 뇌의 본질을 다시금 일깨운다. “감금 상태의 주된 특징은 뇌가 목표한 효과를 달성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이다. (…) 뇌가 어떠한 효과도 달성하지 못하면 아울러 좌절과 실패도 겪지 않는다.” 때문에 절망이란 문을 이미 지난 이들은 두려움도, 자신에 대한 집착과 의지도 없는 텅 빈 상태로 들어선다. “뇌는 더 이상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무언가를 얻으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이것은 불교와 쇼펜하우어가 말한, 고통뿐인 세상에서 해방되기 위한 길과 다름없지 않은가. “그래서 감금증후군 환자들은 우리보다 세상을 훨씬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고, 우리가 평소에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이해력과 통찰력이 뛰어나다.”

뉴런-시냅스 시스템이 전기자극을 주고받는 모습을 형상화한 이미지. 뇌의 본질은 ‘어떤 효과에 도달하려는 데’ 있지만, 이와 정반대로 ‘텅 빈 상태’를 추구하기도 한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뉴런-시냅스 시스템이 전기자극을 주고받는 모습을 형상화한 이미지. 뇌의 본질은 ‘어떤 효과에 도달하려는 데’ 있지만, 이와 정반대로 ‘텅 빈 상태’를 추구하기도 한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텅 빈 상태에 이를 수 있는가? 지은이는 “인간이 텅 빈 상태를 붙잡으려 열심히 노력하면 할수록 텅 빈 상태는 손아귀에서 미끄러져 벗어나 버릴 것”이라고 조언한다. 텅 빈 상태는 목표로 삼아 도달할 수 있는 어떤 ‘효과’가 아니다. 그것은 무력한 인간 존재의 실존적 조건을 ‘만약’이나 ‘그러나’와 같은 ‘토를 달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에 가깝다고 말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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