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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미래의 기술발전으로 과거를 탐구하기

등록 2018-12-07 06:00수정 2018-12-07 20:11

중국계 미국 작가 켄 리우
에스에프 소설집 ‘종이 동물원’
3대문학상 석권 표제작 등 실려
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황금가지·1만5800원

중국계 미국 작가 켄 리우는 2012년 휴고상과 네뷸러상, 세계환상문학상을 휩쓸었다. 1975년 세계환상문학상이 만들어진 뒤 이 세 상을 동시 수상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한국에는 처음 소개되는 그의 소설집 <종이 동물원>에는 초유의 3대 문학상 동시 수상작인 표제 단편을 비롯해 그의 대표 중단편 열넷이 실렸다. 출판사 황금가지는 내년에 그의 장편 <민들레 왕조기 1: 제왕의 위엄>과 <켄 리우 단편 선집> 1·2권을 차례로 내놓을 예정이다.

에스에프(Science Fiction)란 대체로 가깝거나 먼 미래를 배경 삼아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인간 삶의 변화를 상상하곤 한다. 켄 리우 역시 장르적 틀로 보자면 에스에프에 해당하는 소설을 쓰지만, 그가 미래의 기술 발전을 통해 탐구하려는 것이 지나간 일, 즉 과거라는 점에서 여느 에스에프 작가들과 큰 차이를 보인다. 특히 표제작이나 ‘파자점(破字占)술사’ 같은 작품은 약간의 환상적 기법을 동원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최근 국내외 ‘본격문학’ 소설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도를 벗어나지 않고, 오히려 중국 문화대혁명과 대만 2·28 사건 같은 현대사의 아픔을 녹여 넣은 사실주의 소설에 더 가까워 보인다.

휴고상과 네뷸러상, 세계환상문학상을 동시 석권한 중국계 미국 에스에프 작가 켄 리우. “나는 판타지와 에스에프를 구별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기로는 ‘장르 문학’과 ‘주류 문학’을 구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고 소설집 <종이 동물원> 머리말에 썼다.  ⓒLisa Tang Liu
휴고상과 네뷸러상, 세계환상문학상을 동시 석권한 중국계 미국 에스에프 작가 켄 리우. “나는 판타지와 에스에프를 구별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기로는 ‘장르 문학’과 ‘주류 문학’을 구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고 소설집 <종이 동물원> 머리말에 썼다. ⓒLisa Tang Liu
켄 리우가 스스로 가장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는 작품으로 꼽은 중편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동북아시아 현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켄 리우의 소설 세계를 집약해서 보여준다. 소설은 2차대전 당시 일본군 731부대가 저지른 끔찍한 생체실험을 소재로 삼는다. 소설 제목과 같은 다큐멘터리 영화 스크립트 형식을 취했는데, 중국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고 일본 정부가 강력 항의하는 가운데 출시되었다는 안내 자막이 흥미롭다. 실제로 이 소설은 일본에서 출간된 단편집에는 누락되었고 중국어판에서는 공산당에 비판적인 대목을 삭제해야 했다.

소설은 과거의 특정 시공간을 직접 가볼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 과학자 부부, 그리고 그 기술을 활용해 731부대의 만행 현장을 다녀오는 희생자 유족 등을 통해 역사의 상처와 그 치유를 둘러싼 갈등을 다룬다. 가해자인 일본 정부가 진실을 부인하는 가운데, 중국계 미국 역사학자 에번 웨이와 그 부인인 일본계 미국 과학자 아케미 기리노가 과거 시공간에 다녀올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희생자의 유족이 그 기술을 이용해 과거로 다녀오면서 논란이 벌어진다.

“만약 사람들이 과거를 보고 들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더는 냉담한 태도를 유지할 수 없을 거”라고 에번은 믿었다. 그러나 상황은 에번의 믿음과는 달리 전개되었다. 희생자 유족의 ‘목격담’과 같은 취지의 증언을 한 731부대원 출신 노인을 두고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고교 교사는 “그런 이야기를 떠벌리는 사람들은 그냥 관심을 받고 싶은 거예요. 그 왜, 2차대전 때 일본군한테 납치당했다고 주장하는 한국인 매춘부들처럼”이라고 깎아내린다.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한 의원은 “우리는 역사의 노예가 되어 현재를 과거에 종속시키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며 “중국의 위협을 억제하고 이에 정면으로 맞서려면 미국은 일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누군가 과거의 특정 시공간을 다녀오면 그 시공간은 아예 도려내어져 다시는 누구도 같은 시공간으로 갈 수 없다는 기술적 특성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감추고 싶은 역사를 지우려는 자들이 과거 여행을 ‘선점’해 버리는 것. 항의 집회를 막느라 가짜 집회 신고를 먼저 하는 기업의 행태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겠다. 에번의 발명품을 가리켜 “역사를 영원히 종결시켜 버리는 기술”이라 표현한 한 역사학자의 말에서 소설 제목이 왔다.

에스에프 소설집 <종이 동물원>의 작가 켄 리우. ⓒLisa Tang Liu
에스에프 소설집 <종이 동물원>의 작가 켄 리우. ⓒLisa Tang Liu
2차대전이 벌어지지 않고 아시아를 장악한 일본과 미국이 손을 잡고 태평양 횡단 해저 터널을 건설해 대공황을 타개한다는 대체 역사물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 지구를 떠나 외계 이주 여행에 나선 인류가 과학적 진화를 거듭해 마침내 빛의 형태로 영원한 생을 누리게 된다는 ‘파’(波) 같은 작품에서도 역사와 문명에 대한 켄 리우의 관심은 과감하고 활달한 상상력으로 표출된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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