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서 만나요정세랑 지음/창비·1만3000원
정세랑(사진)은 2010년 단편으로 등단했지만 그 뒤로는 단편보다는 장편에 주력해왔다. 연작 <피프티 피플>을 비롯해 장편 여섯권을 낸 뒤에야, 등단 8년 만에 첫 단편집 <옥상에서 만나요>를 낸 것이 그 때문이다.
표제작을 포함해 책에 묶인 아홉 단편은 주로 결혼과 이혼, 연애와 직장생활을 둘러싼 여성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웨딩 드레스 44’는 같은 웨딩 드레스를 차례로 입는 여성 44명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에 담았다. 결혼의 다양한 양태를 다룬 것인데, 여성에게 차별적이고 불리한 결혼 제도에 대한 비판이 두드러진다. “내 몸은 내 거야. 결혼을 한다고 해도 내 몸은 내 거야. 내 마음대로 할 거고 다들 보라고 해”라 선언하는 여성 6, 자신은 전혀 가부장적이지 않다고 자부하는 남편을 향해 “당신 할아버지 제사잖아? 난 만난 적도 없는 분이야. 왜 효도를 하청 주는데? (…) 어쨌든 그게 가부장제야. 당신 눈에는 안 보여도 내 눈에는 보여”라 반박하는 여성 36 등의 목소리가 대표적이다.
‘효진’의 주인공 효진은 “굉장히 여러가지로부터 도망”쳐 일본에 가 있다. 그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쳤나. “태어난 곳으로부터, 소속된 모든 집단으로부터, 제대로 된 관계로부터” 도망쳤다. 어릴적부터 딸이라고 차별하고 멸시하다가 조부모와 엄마가 동시에 앓아눕자 “내려와 집안을 꾸리라는” 아빠,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아들을 둔 예비 시어머니의 비뚤어진 자부심과 소유욕, 그리고 대학원 사회를 혼돈에 빠뜨린 거짓말과 이간질 등에 두루 환멸한 결과다. 결혼할 뻔했던 남자가 “인터넷 사이트에 내 이름과 얼굴을 다 공개하며 자기 집이 가난하다고 홀어머니를 대놓고 무시하면서 도망간 여자라고 글을 올리”는 행위가 효진의 환멸을 한층 부추겼음은 물론이다.
소설집에는 ‘이혼 세일’이라는 단편도 있다. 직장 동료 여성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른 남편과 이혼하기로 한 이재가 친구들을 모아 가구와 생활용품, 옷 등을 싸게 파는 일종의 파티를 연 것. ‘파티’라고 해도 좋을 것이, 이재의 이혼은 슬프고 절망적이기보다는 자유와 해방의 느낌을 준다. 부동산으로 상징되는 결혼 제도에서 벗어나 캠핑카라는 동산에 의지해 자유롭게 다녀보겠다는 이재의 계획이 최종적인 해답은 아닐지라도 새 출발을 향한 첫걸음으로는 그럴듯해 보인다.
표제작의 주인공은 직장 내 성희롱과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다 못해 탈출구로 결혼을 꿈꾼다. “여자들에겐 언제든 도망치고 싶은 대상이 있는걸”이라고 그가 말할 때, 그 말은 효진의 말의 메아리처럼 들린다. 그나마 주인공에게 의지가 되었던 ‘언니들’이 차례로 결혼해서 직장을 떠나간 뒤, 그는 언니들이 건네준 ‘비급’(??)의 도움으로 “인간이면서 인간 아닌” 존재와 맺어지는데, 이 대목에서부터 소설은 리얼리즘에서 판타지로 장르를 바꾼다. 책에는 이 작품 말고도 ‘영원히 77 사이즈’, ‘해피 쿠키 이어’ 같은 판타지물과 ‘알다시피, 은열’ ‘이마와 모래’ 같은 역사물이 함께 실려 있어 작가의 다양한 관심사와 재능을 엿보게 한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