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하이더 와라이치 지음, 홍지수 옮김/부키·1만8000원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병원에 누워 ‘아이언맨’처럼 갖가지 장치를 몸에 단 채 오랫동안 신음하다가 세상을 떠난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응급신호를 듣고 간호사 무리가 우르르 병실에 달려오거나, 의료진이 아침마다 혈당을 확인하려고 여기저기 찔러보는 일”들을 일상으로 겪어야 한다. 현대 의학의 총아인 심폐소생술과 인공호흡기는 떠나려는 사람마저 도로 이승에 붙잡아두는데, 때론 의사들조차 환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명확히 말하기 어려운 일까지 벌어진다.
갑작스런 죽음에 어쩔 수 없이 순응했던 과거와는 판이하게 달라진 오늘날 이 죽음의 풍경. 미국 듀크대학교병원에서 일하는 심장학 전문의이자 작가인 하이더 와라이치는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에서 이 ‘현대적 죽음’(책의 원제)이 과연 무엇인지 파고든다. 현직 의사가 말해주는 ‘현대적 죽음’의 풍경은, 뜻밖에도 우리가 죽음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의사로서 갖춘 의학 지식과 병원에서 겪은 실제 경험 위에 역사와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뛰어난 ‘스토리텔링’ 역량까지 더해졌다.
의사이자 작가인 하이더 와라이치는 자신의 책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에서 과거와 판이하게 달라진 오늘날 죽음의 모습과 죽음을 둘러싼 각종 논란들을 깊게 들여다본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죽음의 풍경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것은 현대 의학의 발전이다. 전염병을 이겨내는 등 인간의 수명은 늘어났지만, “만성질환을 앓으면서 무력하게 연명해야 하는 햇수”도 늘어났다. 미국인을 죽음으로 이끄는 열 가지 원인 가운데 여덟 가지가 심장질환, 뇌졸중, 폐암과 대장암, 만성폐쇄성폐질환, 당뇨, 간경변, 그리고 알츠하이머병이다. “만성질환은 번개처럼 한순간에 인간을 무너뜨리기보다 목숨이 끊어지기 오래 전부터 심신을 미약하게 만든다.” 이것은 “오직 세상을 떠나는 당사자만이 본인을 잘 아는 전문가”였던 과거와 다르게, “자기 삶을 장악할 능력”을 오로지 병원에만 의존하는 ‘현대적 죽음’의 풍경을 만들어냈다.
환자들은 대체로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길 원하지만, 대부분은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죽는 것이 현실이다. 어디에서 죽느냐는 온갖 요인들이 뒤섞여 결정된다. 암 환자는 심장병, 호흡기질환 환자보다 집에서 임종할 확률이 높다. 오랜 기간에 걸쳐 힘든 치료를 감내해야 하는 환자는 집에서 임종할 가능성이 높지만, 간호에 더 손이 많이 가거나 24시간 간호 또는 특별한 장비가 필요한 환자는 집에서 숨을 거둘 확률이 낮아진다. 사회·경제적 요인에 따른 불공평도 심해졌다. 가난한 이들은 부유한 이들보다, 소수인종은 백인보다 병원에서 죽음을 맞을 확률이 더 높다. 뉴욕에서 최빈곤층 거주 지역 주민과 최부유층 거주 지역 주민이 집에서 임종하는 비율의 격차는 런던의 세 배가 넘는다. 소득과 기대수명의 격차 역시 20세기에 들어서야 나타난 현상이다.
지은이는 ‘현대적 죽음’의 풍경을 만들어낸 일등공신으로 ‘심폐소생술’을 꼽는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심장마비를 일으켜 심장이 멈춘 환자를 치료하려면 의사가 환자의 흉부를 절개하고 장갑 낀 손으로 심장을 주물러야 했다. 1947년 최초로 인체에 전기충격을 가해 되살리는 치료에 성공했고, 1956년에는 피부에 부착하는 제세동기가 처음 만들어졌다. 1960년엔 오늘날 심폐소생술의 세 가지 핵심인 산소 공급, 외부적 세동 제거, 흉부 압박이 하나로 통합됐다. “과학기술과 의학이 만나면서 의사가 인간의 삶과 죽음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목숨을 건지는 사람이 많아진 만큼 질환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아졌고, 이들을 치료하기 위한 의료 체계가 급속도로 성장해 오늘날 의료-산업 복합체가 등장하는 데 이르렀다.
2009년 6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은 대법원 판결에 따라 국내 처음으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방식의 ‘존엄사’를 공식 집행했다. 당시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 입구의 모습.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그러나 “의학은 인간이 생존할 능력을 강화해주는 동시에 세상을 떠날 권리를 침해하기 시작했다.” 1975년 ‘죽을 권리’와 ‘존엄사’ 문제를 처음 제기한 ‘캐런 퀸런’ 소송사건은 “사랑하는 사람이 삶과 죽음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는 상황, 인간과 인간 아닌 그 무엇 사이에 놓여 있는 상황”에 대한 새로운 논쟁의 장을 열어젖혔다. “의식불명인 가망 없는 환자”의 존재는 ‘심장사’라는 기존의 개념을 의문에 부쳤고, 의료계는 ‘뇌사’라는 새로운 개념까지 찾아냈다. 그러나 여전히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와 뇌사 상태인 환자 사이에는 광활한 회색지대가 존재한다.” 지은이 역시 의사로서 자신의 여러 경험들을 바탕으로 삼아, 삶과 죽음을 나누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토로한다. “우리는 사망을 재정의하는 대신 생명을 재정의했다. 원래 ‘활력’을 묘사하는 데 쓰이던 이 단어는 이제 삽관한 채로 뇌전도계의 평행선을 단 한 번도 꺾지 못하는 뭄뚱이를 일컫는 데도 쓰이고 있다.”
2009년 국내 첫 ‘존엄사’ 집행에 따라 인공호흡기를 떼어낸 뒤 사망에 이르는 김아무개씨를 지켜보는 가족의 모습. 김씨는 폐암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조직검사를 받다 과다 출혈에 따른 뇌손상으로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으며, 환자의 자녀들은 기계장치로 수명을 연장하지 않는 것이 평소 어머니의 뜻이라며 소송을 제기,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공동사진취재단
궁극적으로 지은이는 죽음의 문제에서 “환자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가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1997년(시행 기준) 미국에서 처음으로 존엄사(‘의사 조력 자살’)를 합법화한 오리건주는, 환자의 자율성과 존엄성을 먼저 생각했기에 “환자가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는 지역”이 될 수 있었다. 환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역설적으로 병원과 의사였다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1960년대 접어들면서 (…) 죽음이 대중과 학계의 담론을 점점 파고듦과 동시에 실제로 죽음을 목격하는 사람은 점점 줄었다. 죽음과 죽는 과정이 발생하는 장소가 병원이라는 제한된 공간으로 점점 옮겨왔기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장에서 지은이는 요즘 사람들이 소셜미디어에서 가족 또는 자신의 병과 죽음, 죽어가는 순간 등을 활발하게 공유하는 현상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어떤 과학적인 혁신보다도 이런 문화적 변화가 우리의 죽는 방식을 개선할 것이라는 기대다. “모두가 침묵을 지키면 죽음은 더욱 막강해진다. (…) 죽음을 물리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죽음에 대해 서로 죽어라 하고 소통하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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