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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내 고향, 둔촌아파트

등록 2018-11-23 06:00수정 2018-11-23 20:14

다섯살 나를 어른으로 키워낸 공간
재개발로 철거돼 역사 속으로
소중한 기억 그림책으로 길어올려

나의 둔촌아파트
김민지 글·그림/이야기꽃·1만6000원

“서울은 이제 아무의 고향도 아니고 모든 타인들의 타향이다.”

서울 사대문 안이 고향인 소설가 김훈의 읊조림처럼, 서울은 10년의 기억도 간직하기 어렵게 빨리 변한다. 옛집들을 부수고 싹 밀어버리는 재개발 방식은 뛰어놀던 골목을 더듬어 기억의 흔적을 찾아갈 수조차 없게 한다. 뒷동산과 실개천이 없는 아파트 공간이 고향이더라도, 단지 사이 세월만큼 무성해진 나무들의 향기와 놀이터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재잘대던 추억은 ‘나’를 이루는 기억의 원천일 테다.

<나의 둔촌아파트>는 다섯 살 유년 시절부터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 작가 자신을 키워낸 둔촌아파트 이야기다. 어디선가 라일락 향기가 코끝을 스칠 때나 지하철을 타고 둔촌역을 지나칠 때면 생생히 닿을 듯하지만, 그 아파트는 더는 없다.

1970년대 말 개발 바람과 더불어 서울에는 우후죽순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시절에 성장기를 보낸 2030세대에게 보편화된 ‘1세대 아파트’는 이제 40년 가까운 연한을 채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단군 이래 최대 재건축’이라는 둔촌주공아파트는 올 1월 5000세대가 넘는 주민들이 완전히 이주하고 재재발에 들어갔다. 이곳 주민들은 유독 이곳을 고향처럼 여기며 아쉬워했다. 아파트를 고향이라 여기는 세대의 ‘실향민 프로젝트’가 탄생한 배경이다.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라는 기억 아카이브 작업은 영화로, 각자의 추억을 담은 책과 영상으로 퍼져 나갔다. 지난달 개봉한 다큐 영화 <집의 시간들>도 그 일환이다.

주민이었던 김민지 작가는 그림책 작업으로 둔촌아파트를 기렸다. 철거돼 사라진 그 공간을 바라보는 심정을 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는 실향민의 마음으로 그린다.

“저녁을 먹으라고 부르는 엄마들 목소리”는 저 거대한 댐을 채운 물속에 잠겨 있다. 기억 속으로 잠수한다. 통통통 도마 소리와 따뜻한 밥 냄새가 흐르고 우르르 몰려오는 아이들 발소리가 들린다. “삐걱거리는 시소 소리도 두부 장수 종소리도 거기 있다. 어느 땐가는 노란 가로등 아래서 나를 기다리던 그 사람도.” 기억은 아파트 단지라는 전체 공간에서 점점 좁혀져 피아노 학원을 오가던 길가의 라일락 나무, 친구의 손 편지와 군사우편이 찍힌 오빠의 편지, 우리집 열쇠를 넣어두곤 했던 우편함을 지난다. 현관 앞 복도에는 엄마들 야단치는 소리, 귀를 간질이던 리코더 소리가 아직 남아 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집에선… 아, 생일파티가 열리고 있다. 곰돌이 인형을 선물로 받은 대여섯 먹은 소녀와 엄마, 아빠, 오빠가 둥그런 소반 위에 놓인 생일케이크 앞에 둘러앉아 있다. 슬픔의 절정은 방문 앞 도배지에 표시된 키 눈금. 이제는 훌쩍 커버린,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응시하는 뒷모습이 텅 비어 있다. 유년의 기억 ‘곰돌이 인형’을 안고 나왔지만 “가져오지 못한 것”이 너무 많다. 재건축 아파트의 경제논리에 함몰돼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도시 실향민에게 위로를 건넨다. 전 연령.

권귀순 기자 gskwon@hani.co.kr, 그림 이야기꽃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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