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두식 경북대 교수가 자신의 새 책 <법률가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창비 제공
우리나라 법률가들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성취를 이룬 ‘최고 엘리트’라 자부해왔다. 그러나 우리 법조계의 뿌리에는 식민지 잔재와 ‘관제 빨갱이’를 만들면서까지 출세를 위해 시대를 등졌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해방 공간의 어수선함을 틈타 시험조차 치르지 않고 법관이 된 이도 적지 않았다.
최근 <법률가들-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창비)을 펴낸 김두식 경북대 교수는 20일 서울 서교동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은 “우리 법조계의 빈약한 뿌리를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짚었다. <헌법의 풍경> <불멸의 신성가족> 등으로 법조계의 구조적 문제를 비판해온 김 교수는 책에서 한국 법조계의 탄생 과정을 복원하며 문제의 뿌리로 거슬러 올라갔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 법조계의 기반은 상상 이상으로 빈약하다. 이를 만든 초창기 역사를 가감없이 복원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관보, 판결문, 미군 노획문서 등 수많은 자료를 뒤지고, 1945~1961년 법조인 3000여명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드는 등 3년간 이 작업에만 매달렸다고 한다.
‘벼락처럼’ 찾아온 해방 직후 한반도 남쪽의 사법 시스템을 정비하는 일은 미군의 시급한 과제였다. 이들은 일제가 남긴 시스템과 자격, 인물을 그대로 활용하는 것을 택했다. 김 교수는 당시 법률가로 활동한 이들을 네 부류로 나눴다. 첫째는 일제 때 ‘고등시험 사법과’ 출신의 판검사 경력자들, 둘째는 ‘조선변호사시험’ 출신의 변호사들이다. 이들은 일제에 의해 자격을 인정받은 법률 전문가였으나, 모두 친일파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첫 단추는 이미 잘못 꿰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개중에는 과거를 반성한 중도·좌익 성향의 인사들도 있었으나, ‘법조프락치’ 사건 등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월북하는 등 사라져갔다.
이들만으로는 사법 시스템을 운용하기 어려워 미군정이 발굴해낸 셋째 부류가 있다. 일제 때 법조계에서 서기, 통역생으로 활동했던 ‘미자격자’들이다. 이들은 해방 뒤 미군정에 의해 판검사로 임용됐는데, 1946년말 기준으로 서기 출신이 전체 판사의 30%, 검사의 50%를 차지했을 정도다. ‘공안검사’의 기원으로 꼽히는 오제도의 경우에서 보듯, 이들은 대체로 ‘실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내기 위해 ‘관제 빨갱이’를 생산하는 데 주된 구실을 했다고 한다.
넷째 부류는 해방 뒤 각종 시험 출신들인데, 이 가운데 ‘이법회’(또는 ‘의법회’)의 존재는 이번에 김 교수가 새롭게 발굴해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1945년 8월15일 조선변호사시험이 치러지던 시간에 일제가 항복하는 바람에, 여기에 응시했던 200여명은 ‘이법회’를 만들어 시험도 없이 합격증을 받아냈다. 이 가운데 남쪽에 있던 106명은 즉시 임용되거나 다른 시험에서 필기시험을 면제받으며 법관이 됐다. 김 교수는 훗날 대법원장까지 지낸 유태흥, 인권운동의 대부로 활약한 홍남순 등이 이법회 출신이라고 밝힌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혐의를 받는 박병대 전 대법관이 지난 1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고 있다. 뒤로는 민중당 회원들이 사법적폐 청산을 촉구하는 손펫말을 들고 서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과연 그 시대에 훌륭한 판검사가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책을 썼다”는 김 교수의 말처럼, 책은 해방 직후 시공간의 절대적인 규정성을 드러낸다. 다만, 유태흥과 홍남순이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것처럼, 사람들의 선택은 모두 같지 않았다. 김 교수는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돌이킨 사람들은 예상한 것 이상의 불행을 맛봤고, 끝까지 개인의 안위만을 추구한 사람들은 기대한 것 이상의 영광을 누렸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전체를 관통하는 흐름이다. 김 교수는 ‘출세의 개인성’이라는 말을 들어, “‘주인’이 누구로 바뀌든, 판검사나 변호사 업무가 갖는 공적인 성격과 관계없이 철저하게 개인적 출세를 추구했다는 것이 한국 법조계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1990년대 터져나온 법조비리가 ‘돈 안 받는’ 사법부를 만들었다면, 지금의 사법농단 사건 역시 ‘사법부의 독립’을 넘어 각 법관이 독립적 권한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드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사법농단 사건을 “긍정적인 변화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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