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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원효부터 김대중까지, 평화사상이 한데 모이다

등록 2018-11-16 06:02수정 2018-11-16 20:08

선현 22명 평화사상을 2권 책으로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2년간 기획
평화학과 연결되는 ‘사상적 자원의 보고’

한국인의 평화사상 1·2
서보혁·이찬수 엮음/인간사랑·각 권 2만7000원

2018년 남북 두 정상의 만남과 이들의 만남이 불러온 거대한 지각변동은 ‘평화’가 우리 시대에 얼마나 중요한 화두인지, 그리고 이 화두에서 한반도란 지역이 왜 중요한지 보여줬다. 전세계가 한반도에서 말하는 평화가 어떤 것인지 귀기울이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화에 대해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고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평화사상을 집성한 책이 나온다. 다음주 출간 예정인 <한국인의 평화사상>은 한반도 문제에 기초한 새로운 평화학 정립을 시도해온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기획한 책이다. 원효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모두 22명의 사상 속에서 “한국 평화학을 정립하기 위한 자양분을 한국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만들어진 평화사상에서 찾기 위한 노력의 결실”(간행사)이다.

1권에서는 원효, 최치원, 이황, 이이, 정조, 정약용, 최시형, 전봉준, 박중빈, 한용운, 안중근을, 2권에서는 유영모, 장일순, 함석헌, 김수환, 김구, 조봉암, 문익환, 윤이상, 리영희, 박완서, 김대중 등을 다룬다. 해당 인물별 전문가들이 한 꼭지씩 맡아서 집필했다. 그동안 개별 인물의 평화사상을 톺아본 연구는 적지 않았으나, 이번처럼 종합적인 기획은 드물었던 것이 현실이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는 “한반도 평화가 어떤 길을 밟아가고 어떤 내용을 담을 수 있는가 생각할 때, 같은 한반도를 살아온 앞선 세대들은 그 시대에서 어떤 사유를 하고 실험을 했는지 알고 싶었다”고 밝힌다.

책이 살펴본 22명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드넓은 시간적 범위를 포괄한다. 위정자의 눈에서부터 민(民)이 겪는 고통의 현장까지, 그 공간적 범위도 넓다. 주로 종교 사상가들이 많긴 하지만, 혁명가, 예술가, 저널리스트, 정치가 등 나름의 평화사상을 제시한 주체들의 성격도 다양하다. 대체로 원효, 유영모, 함석헌 같은 종교 사상가들의 평화사상은 친숙한 편이나, 퇴계와 율곡, 정조와 정약용, 조봉암, 리영희 등의 평화사상은 상대적으로 새롭다.

오늘날 평화학은 대체로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를 구분하는 태도를 취한다. 물리적으로 갈등과 전쟁이 없는 상태라 해서 그것을 평화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비판적인 의문에서 비롯한 접근이다. 때문에 대표적인 평화학자로 손꼽히는 요한 갈퉁은 직접적인 폭력이 없는 상태인 ‘소극적 평화’와 인간 사회 속에 구조적으로 내재한 폭력까지 극복한 상태인 ‘적극적 평화’를 나눠보자고 제시했고, 이렇게 깊은 성찰을 계기로 삼아 평화학은 독립적인 분과학문으로 자리를 잡아갈 수 있었다.

원효대사. 인간사랑 제공
원효대사. 인간사랑 제공
최치원. 인간사랑 제공
최치원. 인간사랑 제공
<한국인의 평화사상> 속에는 오늘날 평화학의 눈으로 봐도 새롭고 신선한 사상적 자원들이 그득하다. 예컨대 원효의 ‘화쟁’(和爭)은 그나마 세간에 잘 알려져 있는 평화사상으로 꼽히는데, 깊이 들여다보면 다른 차원의 자원들이 새롭게 발굴된다. 흔히 화쟁을 ‘개시개비’(皆是皆非), 곧 모두 옳고 또한 그르니 서로의 말을 경청하고 그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정도로 풀이하는데, 책에서는 “쟁(爭)의 과정 없이 화(和)에 초점을 맞추면 ‘거짓 화해’로 귀결된다”고 지적한다. ‘서로 대립되는 것이 상대를 생성’(和)하게 하려면, 먼저 갈등과 대립의 실상(爭)을 철저하게 파고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구조적 폭력을 낳는 권력을 제거하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이 먼저 필요하다는 것이다.

왕이었던 정조의 평화사상도 흥미롭다. 책에서는 당파의 갈등과 대립을 관리하는 ‘탕평’(蕩平)을 그의 주된 평화사상으로 제시하는데, 무엇보다 이전 영조 때의 ‘완론(緩論)탕평’과 다른 ‘준론(峻論)탕평’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붕당을 부정하고 당파의 차이를 없애려 든 것이 ‘완론탕평’이라면, ‘준론탕평’은 갈등과 대립의 현실을 인정하는 대신 각 당파가 내놓는 주장의 합리성을 겨뤄보게 하는 안배 속에서 상호 공존과 공공의 발전을 꾀하는 것이다. 이는 “‘갈등의 분쟁, 폭력의 완화 및 순화’를 중점에 두는 이른바 소극적 평화의 기술이자 사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정조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각종 정책으로 사회적 조건 자체를 만드는 개혁에 나섰는데, 이를 두고 “정의와 질서, 화평을 추구하는 ‘대동(大同)탕평’”으로서 ‘적극적 평화’를 큰 목표로 삼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함석헌. 한겨레 자료사진
함석헌. 한겨레 자료사진
장일순. 인간사랑 제공
장일순. 인간사랑 제공
리영희. 인간사랑 제공
리영희. 인간사랑 제공
22명의 평화사상은 제각각 다른 듯하면서도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얽힌다. 각 장의 제목처럼, 원효와 정조 등이 ‘다양성의 수용과 조화’를 품고 있다면, 국가폭력에 대항하는 민(民)의 주체성을 살려낸 유영모, 비폭력주의와 협화 정신을 강조한 함석헌,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라고 본 장일순 등은 ‘생명공동체의 비전과 실천’을 보여준다. 최시형, 전봉준, 안중근 등은 ‘회통과 상생의 실천’으로, 조봉암, 리영희, 김대중 등은 ‘통일평화의 다른 한 길’로 묶였다.

엮은이 가운데 한 사람인 서보혁(통일연구원)은 <한겨레>와 통화에서 한국인의 평화사상을 관통하는 핵심을 “살림(생명존중)과 평등”으로 압축했다. ‘살림’은 전쟁과 같은 눈 앞의 갈등과 폭력을 없애기 위한 소극적 평화에, ‘평등’은 모든 존재의 존엄성을 보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적극적 평화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평화사상은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를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이를 톺아보다 보면, 전쟁을 없애기 위한 노력 속에 인간 존엄성, 평등과 같은 가치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하는 시대적 고민이 좀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사진 인간사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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