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유작
실패한 과거를 낙원으로 삼는 현상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원인
대화 통해 미래 위한 전망 만들어야
실패한 과거를 낙원으로 삼는 현상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원인
대화 통해 미래 위한 전망 만들어야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여부를 묻는 총선거가 열리기 전인 2016년 5월, 영국의 포퓰리스트 정치인이자 독립당 당수인 나이절 패라지가 “우리나라를 돌려달라”는 글귀가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2016년 벌어진 브렉시트 총선거를 보며 과거를 유토피아로 삼는 현상을 다룬 마지막 책 <레트로토피아>를 썼다. 연합뉴스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아르테·2만원 오지 않은 미래와 달리 과거의 기억은 친숙하고 아늑하다. 2016년 영국이 총선거로 유럽연합(EU)을 탈퇴하겠다고 결정할 때, ‘브렉시트’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극우 정치인 나이절 패라지 등은 “내 나라를 돌려달라”(My Country Back)는 캠페인 구호를 앞세웠다. 그해 말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켰는데, 선거 기간 동안 트럼프 캠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구호로 표심을 자극했다. 이들 구호가 보여주듯 ‘우리의 삶이 이렇게 망가지기 이전’으로 돌아가길 갈구하는 향수병은 확실히 지금 시대에 널리 퍼져 있는 유행병이다. 비교문학자 스베틀라나 보임은 “20세기는 미래의 유토피아로 시작해 향수로 끝났다”고 진단한 바 있다. 지난해 1월 세상을 뜬 폴란드 출신의 영국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1925~2017)이 마지막으로 펴낸 책 <레트로토피아>가 국내에서 번역 출간됐다. 제목인 ‘레트로토피아’는 과거(레트로)와 유토피아의 합성어인데, 옮긴이 정일준 고려대 교수의 말마따나 “평생 ‘생동하는 유토피아’를 외쳐온 희망의 사회학자 바우만의 유작이 ‘레트로토피아’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바우만은 ‘유동하는’(liquid) 액체의 이미지를 통해 지구화와 개인화 속에서 갈수록 커져가는 불확실성을 감내해야 하는 인간과 사회의 조건을 성찰해온 학자다. 이론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고 수많은 주제들을 횡단하며 끊임없이 ‘지금, 여기’를 물어온 지성인으로, 국내에서도 그의 책 30여권이 출간된 바 있다.
지난해 1월9일 세상을 떠난 폴란드 출신 영국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생전 모습. 근대성, 홀로코스트, 소비사회 등이 그의 주된 연구 주제였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파울 클레의 1920년작 그림 ‘앙헬루스 노부스’(새로운 천사). 발터 베냐민은 이 그림에서 과거의 참상을 응시하면서도 ‘진보’라는 이름의 폭풍에 휩쓸려 미래로 떠밀려가는 이미지를 읽어낸 바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1651년 펴낸 책 <리바이어던>의 표지. 홉스는 이 책을 통해 근대국가의 주요 이미지를 정초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올해 4월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열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제목의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집회 제목과 같은 글귀가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선 캠페인 구호였으며, 트럼프의 당선은 영국의 브렉시트 총선거와 같은 배경을 가진 현상으로 평가받았다. 연합뉴스
지옥이 된 ‘사냥꾼의 유토피아’ 속에서
유토피아는 ‘토포스(장소)가 아닌 곳’, 곧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매혹했다.
유토피아에 대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사유는 꽤 오래된 것이어서, 1976년 내놓은 초기 저작 <사회주의, 생동하는 유토피아>(오월의봄, 2016)는 아예 제목에 ‘유토피아’를 박아넣었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출현 역시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확실해진 시기에, 바우만은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자유주의의 반(反)문화로서 여전히 현대의 유토피아”라고 역설했다. 그는 ‘유토피아에 불과하다’는 식의 조소, 곧 “저 너머”(미래)를 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현재)만 희망하는 태도를 깨부수고자 했다. “유토피아는 칼날을 미래로 향하는 나이프와 같은 속성을 지닌다.” 곧 ‘더 나은 세상의 이미지’로서, 유토피아는 그것을 만들기 위한 인간의 행위를 ‘활성화’하는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사냥꾼의 유토피아’는 근대성과 유토피아에 대한 바우만의 사유를 대변해주는 비유다. 2006년 내놓은 책 <모두스 비벤디>(후마니타스, 2010)에서 그는 근대 이전에 인간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사냥터지기’에 비유했다. “사냥터지기의 주요 임무는 관리하도록 맡겨진 땅에 인간이 간섭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이다.” 인간이 어설프게 손을 댔다가 신과 자연이 만들어놓은 조화와 균형을 깨선 안 된다는 태도였다. 근대에 들어서자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이 디자인한 모습으로 세상을 다듬는 ‘정원사’가 됐다. 정원사야말로 “가장 명민하고 전문적인 유토피아의 창조자”였다.
그러나 근대가 막바지에 다다르자, “정원사의 태도는 사냥꾼의 자세에 자리를 내어줬다.” ‘사냥꾼’은 큰 사냥감을 죽이는 데에만 집중할 뿐 숲에 사냥감을 채워놓는 데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이 시대는 모두에게 사냥감이 되기 싫으면 사냥꾼이 되라고 강요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사냥에 참여해야만 한다. 이런 비유에는 탈규제·사유화·개인화로 사람들을 점점 더 ‘쓰레기가 되는 삶’으로 내모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더 나아가, ‘사냥꾼의 유토피아’는 사람들에게서 도래할 미래, 현실을 바꿀 꿈 자체를 빼앗아간다고 바우만은 지적한다. 과거의 유토피아가 ‘언젠가 고생이 끝날 것’이라는 약속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겼다면, 끝없이 사냥에 참여해야 하는 ‘사냥꾼의 유토피아’는 고생이 결코 끝나지 않는 꿈이자 현실이다. 곧 “사냥꾼들에게 제공되는 삶은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가는 삶이 아니라 유토피아 안에서 사는 삶”이다. 그것은 유토피아가 아닌 지옥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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