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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과거는 결코 유토피아가 될 수 없다

등록 2018-11-09 06:00수정 2018-11-09 18:59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유작
실패한 과거를 낙원으로 삼는 현상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원인
대화 통해 미래 위한 전망 만들어야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여부를 묻는 총선거가 열리기 전인 2016년 5월, 영국의 포퓰리스트 정치인이자 독립당 당수인 나이절 패라지가 “우리나라를 돌려달라”는 글귀가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2016년 벌어진 브렉시트 총선거를 보며 과거를 유토피아로 삼는 현상을 다룬 마지막 책 <레트로토피아>를 썼다. 연합뉴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여부를 묻는 총선거가 열리기 전인 2016년 5월, 영국의 포퓰리스트 정치인이자 독립당 당수인 나이절 패라지가 “우리나라를 돌려달라”는 글귀가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2016년 벌어진 브렉시트 총선거를 보며 과거를 유토피아로 삼는 현상을 다룬 마지막 책 <레트로토피아>를 썼다. 연합뉴스

레트로토피아-실패한 낙원의 귀환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아르테·2만원

오지 않은 미래와 달리 과거의 기억은 친숙하고 아늑하다. 2016년 영국이 총선거로 유럽연합(EU)을 탈퇴하겠다고 결정할 때, ‘브렉시트’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극우 정치인 나이절 패라지 등은 “내 나라를 돌려달라”(My Country Back)는 캠페인 구호를 앞세웠다. 그해 말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켰는데, 선거 기간 동안 트럼프 캠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구호로 표심을 자극했다. 이들 구호가 보여주듯 ‘우리의 삶이 이렇게 망가지기 이전’으로 돌아가길 갈구하는 향수병은 확실히 지금 시대에 널리 퍼져 있는 유행병이다. 비교문학자 스베틀라나 보임은 “20세기는 미래의 유토피아로 시작해 향수로 끝났다”고 진단한 바 있다.

지난해 1월 세상을 뜬 폴란드 출신의 영국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1925~2017)이 마지막으로 펴낸 책 <레트로토피아>가 국내에서 번역 출간됐다. 제목인 ‘레트로토피아’는 과거(레트로)와 유토피아의 합성어인데, 옮긴이 정일준 고려대 교수의 말마따나 “평생 ‘생동하는 유토피아’를 외쳐온 희망의 사회학자 바우만의 유작이 ‘레트로토피아’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바우만은 ‘유동하는’(liquid) 액체의 이미지를 통해 지구화와 개인화 속에서 갈수록 커져가는 불확실성을 감내해야 하는 인간과 사회의 조건을 성찰해온 학자다. 이론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고 수많은 주제들을 횡단하며 끊임없이 ‘지금, 여기’를 물어온 지성인으로, 국내에서도 그의 책 30여권이 출간된 바 있다.

지난해 1월9일 세상을 떠난 폴란드 출신 영국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생전 모습. 근대성, 홀로코스트, 소비사회 등이 그의 주된 연구 주제였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지난해 1월9일 세상을 떠난 폴란드 출신 영국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생전 모습. 근대성, 홀로코스트, 소비사회 등이 그의 주된 연구 주제였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발터 베냐민은 <역사철학테제>에서 파울 클레의 그림 ‘새로운 천사’(1920)를 두고, 과거의 파국을 보면서도 ‘진보’라는 이름의 태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미래로 떠밀려가는 이미지를 제시한 바 있다. <레트로토피아>의 서문에서 바우만은 이 ‘역사의 천사’가 방향을 바꾸고 있는 중이라고 진단한다. 그 천사는 “얼굴은 과거에서 미래로 돌리는 중이고 날개는 당대에 불고 있는 폭풍 때문에 앞선 상상과 기대로 두려웠던 미래의 지옥에서 과거라는 천국을 향해 뒤쪽으로 떠밀리고 있다.” 이렇게 방향을 바꾼 천사의 이미지를 통해, 바우만은 과거를 유토피아로 삼으려 하는 오늘날의 병리적 상태를 짚어내려 한다.

유토피아는 현실에 대한 부정으로 만들어진다. 전근대 시기 안전과 자유를 담보해줄 ‘토포스’(주권국가로 대변되는 고정된 장소)를 세우는 것을 유토피아로 삼았다면, 근대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어떤 특정한 토포스에 매이지 않는 것이 유토피아가 됐다. ‘국경 없는 자본’, ‘영토 없는 통치’를 목표로 개인으로 하여금 국가와 사회를 대체하도록 만들려는 지구화·개인화·사유화의 흐름(바우만은 이를 ‘하청’이라고 표현한다)이 그 핵심에 있다. 그러나 이런 ‘토포스 없는 유토피아’ 속에서 개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비참한 조건 아래에 놓이게 됐다. 이제 새로운 문제는 이런 조건 아래에 불안과 절망, 그리고 분노에 내몰린 사람들이 유토피아에 대한 ‘이차 부정’으로서 ‘이미 실패한 과거’를 새로운 유토피아로 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파울 클레의 1920년작 그림 ‘앙헬루스 노부스’(새로운 천사). 발터 베냐민은 이 그림에서 과거의 참상을 응시하면서도 ‘진보’라는 이름의 폭풍에 휩쓸려 미래로 떠밀려가는 이미지를 읽어낸 바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파울 클레의 1920년작 그림 ‘앙헬루스 노부스’(새로운 천사). 발터 베냐민은 이 그림에서 과거의 참상을 응시하면서도 ‘진보’라는 이름의 폭풍에 휩쓸려 미래로 떠밀려가는 이미지를 읽어낸 바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바우만의 분석은 ‘홉스로의 회귀’, ‘부족으로의 회귀’, ‘불평등으로의 회귀’, ‘자궁으로의 회귀’ 등 네 개의 글뭉치로 전개된다. ‘홉스로의 회귀’는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으로 상징되는 ‘폭력을 독점하는 근대 주권국가’의 실패를, ‘부족으로의 회귀’는 공동체와 개인 사이의 모순이 끝내 ‘나’와 ‘그들’을 나누고 ‘그들’을 배제하는 ‘부족주의’를 다시금 부추기고 있는 현상을 다룬다. 온 세계에 들끓는 전쟁과 테러, 민족주의의 새로운 열풍은 이런 회귀 현상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불평등으로의 회귀’는 ‘복지국가’의 실패 이후 급격히 확대되는 경제적 불평등을, ‘자궁으로의 회귀’는 자본주의가 구축한 문화와 생활세계 속에서 갈수록 개인의 문제에만 침잠하는 나르시시즘의 문제를 다룬다. 이런 흐름들의 원천에는 “변덕스럽고 불확실한 현재에 내재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레트로토피아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이상 미래를 꿈꾸지 않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무엇보다도 치명적이다.

그렇다면 과연 바우만에겐 ‘역사의 천사’를 다시 미래로 돌려세울 아이디어가 있을까? 오랫동안 ‘문화’의 중요성을 천착했던 바우만은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제시한다. 얼핏 추상적인 결론처럼 보이지만, 결국 서로 다른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만이 미래를 만들어가는 발판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생각은 다음과 같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연설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대화는 타인을 유효한 대화 상대로 바라보고, 외국인, 이주자, 그리고 다양한 문화에서 온 사람들을 경청할 가치가 있는 존재로 존중하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대화를 만남의 한 형태로 특별하게 생각하는 문화’를 형성하고, ‘공정하게 반응하는 포괄적인 사회라는 목표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합의와 동의를 구축하는 수단’을 창조하는 데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긴급히 동참시켜야 한다.”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1651년 펴낸 책 <리바이어던>의 표지. 홉스는 이 책을 통해 근대국가의 주요 이미지를 정초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1651년 펴낸 책 <리바이어던>의 표지. 홉스는 이 책을 통해 근대국가의 주요 이미지를 정초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그러나 “우리가 서로를 ‘유효한 대화 파트너’로 인식하고 대우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추가적인 조건들이 부합되어야 한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상호인정한 평등한 지위”의 보장, 곧 모두에게 적용되는 공정한 경제모델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불평등으로의 회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바우만은 ‘보편적 기본소득’ 프로젝트를 “파국을 향하는 흐름을 뒤집으려는 투쟁에서 유례없이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라 꼽는다. ‘보편적 기본소득’에 담긴 철학은 과거 지구화·개인화의 흐름 속에서 끝내 실패해버린 ‘복지국가’의 기반을 뒤집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배제가 아닌 포함을 상징하며, 결속력을 분열시키는 번식으로 사회를 구분하지 않고 사회연대와 사회통합을 촉진시킨다.” 기본소득 등 미래를 위한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현실에서 가동할 수 있다“고 주장한 네덜란드 출신 저널리스트 뤼트허르 브레흐만(<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의 지은이)의 작업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대안이 없다”며 아늑한 과거에만 머문다면, “같이 공동묘지에 들어가는 일”만 남을 뿐이기 때문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올해 4월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열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제목의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집회 제목과 같은 글귀가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선 캠페인 구호였으며, 트럼프의 당선은 영국의 브렉시트 총선거와 같은 배경을 가진 현상으로 평가받았다. 연합뉴스
올해 4월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열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제목의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집회 제목과 같은 글귀가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선 캠페인 구호였으며, 트럼프의 당선은 영국의 브렉시트 총선거와 같은 배경을 가진 현상으로 평가받았다. 연합뉴스
지옥이 된 ‘사냥꾼의 유토피아’ 속에서

유토피아는 ‘토포스(장소)가 아닌 곳’, 곧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매혹했다.

유토피아에 대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사유는 꽤 오래된 것이어서, 1976년 내놓은 초기 저작 <사회주의, 생동하는 유토피아>(오월의봄, 2016)는 아예 제목에 ‘유토피아’를 박아넣었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출현 역시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확실해진 시기에, 바우만은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자유주의의 반(反)문화로서 여전히 현대의 유토피아”라고 역설했다. 그는 ‘유토피아에 불과하다’는 식의 조소, 곧 “저 너머”(미래)를 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현재)만 희망하는 태도를 깨부수고자 했다. “유토피아는 칼날을 미래로 향하는 나이프와 같은 속성을 지닌다.” 곧 ‘더 나은 세상의 이미지’로서, 유토피아는 그것을 만들기 위한 인간의 행위를 ‘활성화’하는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사냥꾼의 유토피아’는 근대성과 유토피아에 대한 바우만의 사유를 대변해주는 비유다. 2006년 내놓은 책 <모두스 비벤디>(후마니타스, 2010)에서 그는 근대 이전에 인간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사냥터지기’에 비유했다. “사냥터지기의 주요 임무는 관리하도록 맡겨진 땅에 인간이 간섭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이다.” 인간이 어설프게 손을 댔다가 신과 자연이 만들어놓은 조화와 균형을 깨선 안 된다는 태도였다. 근대에 들어서자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이 디자인한 모습으로 세상을 다듬는 ‘정원사’가 됐다. 정원사야말로 “가장 명민하고 전문적인 유토피아의 창조자”였다.

그러나 근대가 막바지에 다다르자, “정원사의 태도는 사냥꾼의 자세에 자리를 내어줬다.” ‘사냥꾼’은 큰 사냥감을 죽이는 데에만 집중할 뿐 숲에 사냥감을 채워놓는 데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이 시대는 모두에게 사냥감이 되기 싫으면 사냥꾼이 되라고 강요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사냥에 참여해야만 한다. 이런 비유에는 탈규제·사유화·개인화로 사람들을 점점 더 ‘쓰레기가 되는 삶’으로 내모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더 나아가, ‘사냥꾼의 유토피아’는 사람들에게서 도래할 미래, 현실을 바꿀 꿈 자체를 빼앗아간다고 바우만은 지적한다. 과거의 유토피아가 ‘언젠가 고생이 끝날 것’이라는 약속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겼다면, 끝없이 사냥에 참여해야 하는 ‘사냥꾼의 유토피아’는 고생이 결코 끝나지 않는 꿈이자 현실이다. 곧 “사냥꾼들에게 제공되는 삶은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가는 삶이 아니라 유토피아 안에서 사는 삶”이다. 그것은 유토피아가 아닌 지옥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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