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화의 제국-자본주의의 새로운 역사
스벤 베커트 지음, 김지혜 옮김/휴머니스트·4만2000원
오늘날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자본주의는 언제 어디서 태어난 것일까?
이 원대하고도 중요한 질문을 두고 다양한 답변이 제출되었지만, 대세를 형성해온 답변은 ‘18세기 산업혁명’이었다. 하지만 최근 여기에 새로운 답변을 내놓아 세계 역사학계의 관심을 받는 학자가 있다. 2014년에 <면화의 제국>을 펴낸 스벤 베커트 하버드대 교수(미국역사)다.
그는 10년간 전 세계의 기록보관소와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조사한 결과, 18세기 산업자본주의 이전에 전 세계적인 연결망을 형성한 자본주의가 있었다고 말한다. 16세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전쟁자본주의’(war capitalism)가 그것이다. 그동안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상인’ 또는 ‘상업자본주의’라고 불렀지만, 이런 용어는 실제 일어난 양상을 담지 못하는 표현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1895년에 그려진, 면화를 수확하는 노예들의 모습. 휴머니스트 제공
“그래 맞아! 면이 양모보다 더 유용하다는 게 맞구만!” 1862년경 그려진 그림. 휴머니스트 제공
이런 전쟁자본주의의 출생지는 바로 대규모로 재배되는 면화 농장이었다. 애초 유럽은 5천년에 이르는 면화의 역사에서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등에서 활발히 면화를 재배하고 가공기술을 발전시킬 때 유럽은 주로 양모와 아마로 된 옷을 입었다. 하지만 12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면화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1496년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개척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유럽의 상인들은 군사력을 앞세워 국제적 무역항로들에서 경쟁자들을 밀어냈다. 자본가들은 아프리카와 인도 등 다양한 지역에서 대규모 면화 농장을 건설했고, 여기에 노예들을 강제로 동원했다. 지금이야 자본주의가 국가가 만든 법의 제약을 받지만, 초기 자본주의에선 노예농장주처럼 돈과 힘을 가진 이들의 권한이 절대적이었다.
1912년께 촬영한 사진으로 한국의 면화 재배인과 함께 면화밭에 선 일본 식민지 관료들의 모습. 휴머니스트 제공
2016년 미국 매사추세츠대학에서 강연하는 스벤 베커트 하버드대 교수. 출처 위키미디어
이런 세계적 규모의 면화 무역으로 축적한 부를 토대로 막대한 양의 면화를 빠른 시간 안에 적은 노동력으로 가공하려는 기술적 압력이 폭발한 것이 바로 18세기 산업혁명이었다. 즉, 자본주의는 그 시작부터 전쟁과 약탈, 노예제와 식민주의로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 앞에서 유럽이 합리적인 프로테스탄트 신앙이나 계몽주의, 과학적 합리주의, 선진적 금융제도 등의 덕택으로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고 가장 앞선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들은 빛을 잃고 만다. “면화의 제국을 통과하는 여행에서 우리가 확인한 것은 세계 최초의 글로벌 산업의 진화와 그것을 모델로 삼은 다른 여러 산업의 진화에서 문명과 야만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20세기 중반에 들어 면화의 제국에 대한 유럽의 오랜 지배는 끝났다. 하지만 지은이는 여전히 값싼 면화를 재배하기 위해 벌어지는 저임금 노동, 아동 노동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예로 우즈베키스탄에서 정부의 주도로 15살 이하의 어린이 200만명이 면화 수확에 투입되며, 중국에선 노동조합을 탄압해 저임금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든다. 이런 배경에는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자본이 있다. 지은이는 유례 없이 확대된 이 생산력을 자본이 통제하고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정의로운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김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