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귀남이부터 군무새까지 그 곤란함의 사회사
최태섭 지음/은행나무·1만5000원
한때 일부 한국 남자들은 “남자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한다”며 ‘된장녀’에게 돌을 던졌다. 그런데 이제는 “여자는 왕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Girls do not need a Prince)는 문구가 새겨진 옷을 입었다며 ‘메갈년’이라고 분노한다.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걸까? 이런 장면도 있다. 이른바 ‘미러링’을 통해 한국 남성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어떤 남성들은 호기롭게도 “한국 여자와 섹스하지 말자”는 주장을 내놨다. 그런데 “한국 남자들의 그 모든 주장 가운데 이렇게 여성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은 것은 없었다.” 이런 현상들은 ‘한국 남성’이란 존재 자체가 헤어나오기 힘든 어떤 ‘곤란함’에 빠져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청년, 노동, 잉여와 같은 테마들로 우리 사회의 변화하는 지형을 관찰해온 문화비평가 최태섭(34)은 최근 펴낸 책 <한국, 남자>를 통해 이 한국 남성의 ‘곤란함’을 깊숙하게 들여다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곤란함’의 정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한국 남자는 그 시작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이상적인 상(남성성)을 현실로 구현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실패를 언제나 다른 사회적 약자들 특히나 여성의 탓으로 돌려왔다.” 스스로 30대 중반에 접어든 한 명의 한국 남자로서, “누군가를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한 사람의 주체로, 또 타인과 연대하고 돌보는 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지은이의 고민이 책 전체에 서려 있다.
‘남성성’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두루 살펴본 지은이는, 남성성이란 것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게 아니라 어떤 지배 체제를 구축하고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지적한다. “남성성은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투쟁과 동의, 전략의 산물”이다. 이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궁극적으로 가부장제와 남성 우위의 사회 체계를 지키기 위해 작동하고, 남성들은 이 체계에 복무하는 대가로 ‘배당금’을 챙긴다. 문제는 이 ‘배당금’이 여성 등 남성성에 해당하지 않는 것들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데서 만들어지며, 남성 내부에서마저 불공정하게 배분된다는 것이다. “남성 지배란 소수의 권력을 가진 남성들을 위해 다수의 별 볼 일 없는 남성들이 열과 성을 다해 복무하는 불공정한 게임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의 가부장제는 ‘생계 부양자’로서 남성성 모델에 주로 기대왔다. 그러나 문화평론가 최태섭은 “한국 남성은 단 한 번도 온전한 가부장이었던 적이 없다”고 지적한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한국 사회에서 남성성의 문제는 좀 더 복잡해진다. “강력한 가부장제에 기초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결합”으로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구축했으나, 식민 지배와 전쟁, 빈곤과 압축적 근대화 속에서 남성들이 끊임없이 국가 폭력, 전쟁, 빈곤에 희생당하는 등 한국 사회가 내세웠던 남성성은 결코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남자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보편적인 근대화란 정상 가족을 이루고 중산층이 되어, 가장 곧 ‘생계 부양자’의 지위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가족을 온전히 먹여살리지 못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산업화 시대 기혼 남성들이 실제로 가족을 온전히 부양할 수 있었는지 살펴본 연구 결과를 보면,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남성들의 고용 상태는 하향 이동했다. 이와 맞물려 여성들의 경제활동은 증가했다. “대다수의 한국 남자들의 경제적 삶이란 좌절의 연속이고, 결국 여성들은 어떤 형태로든 경제활동에 종사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가부장제가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피지배 남성들의 불안과 고통이 그것을 가져다준 지배 체제로 향하지 않고 그들보다 더 아래에 있던 여성에게 향했기 때문이라 한다. 남성성을 추구하며 생긴 여성에 대한 극심한 차별과 여성 혐오는 지배 남성들이 피지배 남성들에게 던져 준 ‘먹잇감’이었다. 1950년대에 이미 양공주, 자유부인, 유엔 마담 등 ‘부도덕한 여성’을 제물로 삼는 여성 혐오가 있었다. “국가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나마 가족을 중심으로 모여서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는 생각도 가부장제 유지에 영향을 끼쳤다.
한국 사회에선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이 안정적으로 정착하지 못했음에도 가부장제가 존속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최태섭은 “사회적으로 여성에 대한 극심한 차별이 만연한 가운데, 사실 별로 미덥지 못한 국가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가족을 중심으로 뭉쳐서 생존을 도모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짚는다. 영화 <국제시장> 가운데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변화는 90년대에 찾아왔다. 외환위기는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한마디로 “돈을 벌어오지 못한다면 아버지란 대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 물음이 제기된 것이다. 한국 사회의 대대적인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기존 남성성의 변화를 촉구한 셈이다. 그러나 남성들은 여전히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남성성 헤게모니 자체는 와해되지 않았다. 정작 구조조정의 칼바람 속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여성들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억울한 남자들”, 여성에게 목을 매면서도 여성을 혐오하는 ‘곤란함’에 빠진 남자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태어났다고 지은이는 진단한다. 청년 세대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전반적으로 악화하면서, “2000년대 새로운 남성 청년들은 남성성에 대한 신파적 향수와 페미니즘에 대한 반동으로 무장하게 됐다.” 곧 결코 실현된 적 없는 과거의 남성성을 조작해 만들어내고 그것을 그리워하며, ‘이젠 남성이 여성에 견줘 역차별을 받고 있다’는 식의 ‘자기 피해’ 서사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90년대 말 ‘군 가산점 논란’은 이런 흐름의 본격적인 시작이었고, 그것은 이제 온라인 놀이 문화 등을 타고 “출구 없는 순환”을 하며 광범위한 여성 혐오로 확산되고 있는 중이라 한다.
“물론 2000년대 중반 이후 청년 세대 남성들이 이전 세대의 남성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청년 세대 남성들보다 더 열악한 곳에 청년 세대 여성들이 있다는 것 역시 사회적 사실이다. 수많은 통계와 지표들이 고용, 임금, 노동 과정 전반에 걸쳐 여성들이 차별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한국의 성별 고용률에서 여성이 남성에 앞서는 것은 오직 20대 때뿐이고 30대가 되는 순간 남성의 고용률은 수직 상승하는 반면 여성의 고용률은 급격하게 하락하기 시작한다.”
‘군 가산점’ 폐지에 반대하는 예비역 남성들의 집회 장면.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에 격렬하게 일어났던 ‘군 가산점’ 논쟁은 “남성이 ‘오히려’ 사회의 피해자”라는 적반하장식 주장이 나오는 흐름의 첫머리에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여성들이 이런 오랜 차별과 억압을 뚫고 끊임없이 자기 주체화를 시도해 세상을 바꿔나가는 동안 남성들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
이것이 지은이가 던지는 핵심적인 물음이다. 과거에도 제대로 실현된 바 없는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은, 앞으로 더더욱 급격하게 해체되어갈 것이란 현실이 눈앞에 있다. 이런 판국에 한국 남성은 ‘진짜 남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의존해줄 여자를 찾아야 한다’는 과거의 환상에 매달리고 있다. “스스로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서는 것을 배우지 못한 이는 여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남자들이다.”
“마스크를 쓰고 여성들의 시위에 나가 분탕질을 치는 것도, 염산을 뿌리겠다고 협박 글을 올리는 것도, 이퀄리즘을 주장하고 총여학생회를 없애자고 선동하는 것도, 남자들을 아무 곳으로도 데려가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결정해야 한다. 어디로 갈 것인가 형제여?”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