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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헬조선’ 한탄한 택리지, 제 모습을 찾았다

등록 2018-10-25 20:08수정 2018-10-25 20:28

한문학자 안대회, 후학들과 정본화 작업
이본 200여종 검토, 선본 29종 추려내
초고본·개정본의 존재도 새롭게 밝혀
‘살 만한 땅 없다’ 이중환의 절망 담겨
완역 정본 택리지
이중환 지음, 안대회·이승용 외 옮김/휴머니스트·3만5000원

완역 정본 택리지-이중환, 조선 팔도 살 만한 땅을 찾아 누비다
이중환 지음, 안대회·이승용 외 옮김/휴머니스트·1만6000원(보급판)

“‘택리지’의 이본이 많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렇게나 많을 줄은 미처 몰랐어요. 150여종 정도로 생각했는데, 막상 찾아보니까 200여종이 넘는 판본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더 찾아보면 300여종까지도 늘어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만큼 많이 읽혔던, 요샛말로 열화와 같은 성원을 얻은 베스트셀러였던 셈이죠.”

조선 후기 이중환(1691~1756)이 쓴 ‘택리지’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인문지리서로 꼽힌다. 현대 우리말로도 많이 옮겨졌을 뿐 아니라 외국어 번역본도 몇 종 나왔다. 그러나 신뢰할 만한 ‘정본’ 없이 서로 내용이 다른 판본들이 난립해온 지 오래라, 과연 우리가 고전을 제대로 소화하고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어 왔던 터다.

우리 한문 고전을 발견해내고 새롭게 새기는 작업을 꾸준히 펼쳐온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대동문화연구원장)는 최근 박사과정 후학 9명과 함께 <완역 정본 택리지>(이하 <택리지>)를 펴냈다. 6년 가까운 시간을 들여 200여종의 이본들을 비교해 29종의 선본을 추리고, 정밀하게 교감해 ‘정본’을 냈다는 점에서 출간의 의미가 남다르다.

최근 후학들과 함께 ‘택리지’ 완역 정본을 펴낸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가 24일 서울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에서 ‘택리지’의 수많은 이본 가운데 하나를 펴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최근 후학들과 함께 ‘택리지’ 완역 정본을 펴낸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가 24일 서울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에서 ‘택리지’의 수많은 이본 가운데 하나를 펴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24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에서 <한겨레>와 만난 안 교수는 “정본의 텍스트를 꼼꼼하게 만들어놓는 것이 모든 학문의 기본인데, 이제서야 그 기본을 만들어 ‘택리지’를 정확하게 읽을 수 있게 됐다”고 자평했다.

그동안 많은 ‘택리지’들은 1921년 최남선이 편집해 간행한 ‘광문회본’을 주된 저본으로 삼아왔다. 일어, 영어 번역본도 광문회본을 옮겼다. 안 교수는 “광문회본은 원래 저작과 상당히 차이가 나는 판본”이라 보고, “광문회본에 구애받지 않고 많이 읽히는 것 중심으로 교감을 했다”고 말한다. “당시 최남선은 민족주의적 시각을 앞세웠기 때문에, 원래 저작 중에서 사대주의적 색채를 보이는 부분을 빼버리는 등 과도한 편집을 했다”는 것이다. <택리지>는 ‘서론’과 ‘결론’을 제대로 밝히는 등 편목과 구성도 전체적으로 새롭게 다듬었다.

특히 안 교수는 “그동안 몰랐던 초고본과 개정본의 존재를 이번에 처음으로 밝혔다”고 강조했다. 이중환은 1751년 작성한 초고본을 같은 집안 사람인 성호 이익에게 보냈는데, 성호의 서간 등을 보면 이중환이 1756년 죽기 전에 원고를 개정한 사실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개정본이 나오기도 전에 초고본이 워낙 많이 퍼져나가 초고본과 개정본이 함께 뒤섞여 유통돼 왔다는 얘기다. 초고본에서 적극 인용했던 ‘풍수설’을 배제하는 등 개정본은 초고본과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또 현재 확보한 200여종의 판본들 가운데 3분의 2 정도가 개정본 계열, 나머지가 초고본 계열로 추정된다고 했다.

최근 후학들과 함께 ‘택리지’ 완역 정본을 펴낸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가 24일 서울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정본화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안 교수는 박제가의 ‘북학의’, 한재락의 ‘녹파잡기’, 홍만종의 ‘소화시평’ 등에 대해서도 정본화 작업을 한 바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최근 후학들과 함께 ‘택리지’ 완역 정본을 펴낸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가 24일 서울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정본화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안 교수는 박제가의 ‘북학의’, 한재락의 ‘녹파잡기’, 홍만종의 ‘소화시평’ 등에 대해서도 정본화 작업을 한 바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택리지’는 과연 어떤 책이기에 이본이 이렇게 많을 정도로 뜨거운 인기를 얻었을까? 기본적으로 ‘택리지’는 전국 팔도를 대상으로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이 어딘지 따져본 책이다. ‘팔도론’에서 전국 팔도의 현황을 두루 짚고, ‘복거론’에서 ‘지리’, ‘생리’, ‘인심’, ‘산수’ 등 네 가지 잣대로 ‘살 만한 곳’을 찾아본다. 단순한 지리 정보뿐 아니라 어디의 농업 수확량이 많고 어디에 물류가 집중돼 있는지 등 각 지역의 경제활동 현황(생리), 그 지역에 전해내려오는 구비전설 등 정신문화의 현황까지 종합적이고 복합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탁월한 점으로 꼽힌다. 당시 사대부들은 이익 추구를 백안시했는데, 이중환은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이익을 얻는다”며 강경(충청도), 법성포(전라도), 김해(경상도), 원산(함경도) 등 물류로 이익을 거둘 수 있는 지역들을 소개하는 등 이에 구애받지 않았다. 안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간행되기도 전에 일본과 중국에서 먼저 간행됐을 정도로 이 땅과 사람들의 삶에 대해 가장 종합적이고 복합적인 정보를 담고 있는 명저”라고 말했다.

한꺼풀 더 파고들어가면, ‘택리지’에 숨어 있는 또다른 메시지를 찾아낼 수 있다. 조선 팔도를 신나게 종횡하던 이중환은 뜻밖에도 ‘결론’에서 “몸을 둘 곳이 거의 아무 데도 없다”, “살 만한 땅을 가려 살고자 해도 살 만한 땅이 없음을 한스럽게 여겨 이를 기록한다” 등 절망적인 태도를 보인다. “사대부가 사는 곳은 인심이 어그러지고 망가지지 않은 데가 없다”고도 적었다.

최근 후학들과 함께 ‘택리지’ 완역 정본을 펴낸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가 24일 서울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정본화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안 교수는 박제가의 ‘북학의’, 한재락의 ‘녹파잡기’, 홍만종의 ‘소화시평’ 등에 대해서도 정본화 작업을 한 바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최근 후학들과 함께 ‘택리지’ 완역 정본을 펴낸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가 24일 서울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정본화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안 교수는 박제가의 ‘북학의’, 한재락의 ‘녹파잡기’, 홍만종의 ‘소화시평’ 등에 대해서도 정본화 작업을 한 바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한때 남인에서 정승감으로까지 꼽혔던 이중환은 붕당정치의 극한 갈등에 휘말려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됐고, 죽는 날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그런 그에게 사사로운 당파의 싸움이 모든 것을 찢어놓는 이 땅의 현실은 그야말로 ‘헬조선’이었으리라. 안 교수는 “’아무리 경제가, 산수가 좋아도 살 곳이 없다’는 그의 탄식에는 국토에 대한 애정과 증오가 함께 섞여 있다. 그런 깊은 애증이야말로 ‘택리지’에 이 땅의 모든 것을 폭넓게 담게 만든 동력이었다”고 짚었다. 역사학자 정인보가 쓴 ‘발문’의 다음 내용은, 이중환의 저작 의도를 잘 설명해준다. “치우치고 사사로운 당파의 견해를 뿌리째 뽑아버린 뒤라야 비로소 자기 마음의 본바탕을 찾을 수 있으며, 자기 마음의 본바탕을 찾은 뒤라야 비로소 사람으로 설 땅이 있다는 것이다.”

이번 출간으로 “해묵은 숙제를 기어이 털어냈다”는 안 교수는, 앞으로도 “18세기의 다양한 고전을 통해 ‘한국적 정신의 원형’을 찾는 작업을 계속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내년 초쯤에는 18세기 도시에서 일어났던 역동적 문화를 드러내는 저술을 낼 계획이라 한다. 왜 18세기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지 물어보니, 그는 “근대 이전에 가장 자유로운 상상을 했고, 국가가 지식인을 가장 덜 압박했던 시기라서 재밌게 연구할 수 있다”고 답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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