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 덩샤오핑
알렉산더 판초프·스티븐 레빈 지음, 유희복 옮김/알마·4만7000원
“중국은 잠자는 거인이다. 자게 내버려둬라. 깨어나면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200여년 전, 세인트헬레나에 유폐 중이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중국의 잠재력을 내다 본 경고였다. 2014년 3월, 수교 50년을 맞아 프랑스를 국빈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이라는 사자는 이미 깨어났으며, 이 사자는 평화적이고 온화한 문명의 사자”라고 호언했다. 현재 중국의 경제 규모는 세계 1~2위를 다투며, 국제사회에서의 위상도 미국과 함께 ‘주요 2개국’을 뜻하는 ‘G2’로 불릴 정도다.
중국의 역사는 수천년에 이르지만, 오늘날 중국은 20세기 중반에 세워진 신생국에 가깝다. 1949년 10월,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 세력이 일본과의 반제 투쟁에 이어 장제스 국민당 정권과의 내전에서 최종승리한 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내년이면 건국 70년을 맞는 중국이 지금의 모습으로 우뚝 선 결정적 계기를 만들고 주도한 인물이 바로 덩샤오핑(1904~1997)이다. 중국식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와 공산당 일당지배 체제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켜 현대 중국의 모습을 정초한 주인공이다. 올해는 1978년 11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가 당 업무의 무게중심을 계급투쟁에서 경제건설로 옮기고 개혁개방 노선을 공식화한지 4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78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분수령을 가른 이가 신장 152㎝의 ‘작은 거인’ 덩샤오핑이다.
2004년 8월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도시인 광둥성 선전의 유치원생들이 덩샤오핑 탄생 100돌을 맞아 그의 초상을 담은 대형 간판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선전/로이터 연합뉴스
1945년 1월 촬영된 덩샤오핑(맨 오른쪽)의 가족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설계자 덩샤오핑>은 미국의 두 역사학자가 20세기 중국의 영웅이자 현대 중국의 ‘설계자 덩샤오핑’의 일생을 촘촘하면서도 거시적으로 재구성한 본격 평전이다. <덩샤오핑: 혁명적 일생>이란 원서 제목처럼,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덩샤오핑이 프랑스에 유학해 공산주의를 공부하던 10대 시절부터, 청년시절 공산당원으로의 성장, 항일전쟁과 국공내전 시절 군인으로서의 면모, 공산주의 학습과 권력 핵심부 진입, 국가 건설노선을 둘러싼 마오쩌둥과의 협력과 갈등, 숙청 위기와 복권, 마오쩌둥 사망 이후 최고지도자 부상, 개혁개방 정책의 주도, 신세대의 민주주의열망 압살과 사망까지 그의 삶과 사상 전체를 아울렀다.
책의 두 저자인 러시아 출신의 미국 캐피탈대학교 역사학 교수 알렉산더 판초프와 미국 몬태나대학교 역사학과 고등연구원 스티븐 레빈은 앞서 2012년 <마오: 진짜 이야기>(MAO: The Real Story)도 공저로 낸 바 있다. 이 책도 지난해 국내에 <마오쩌둥 평전-현대 중국의 마지막 절대 권력자>(민음사)라는 제목의 우리말 번역본을 얻었다.
이전에도 국내에 덩샤오핑의 일생에 주목한 책들은 적잖이 나왔다. 최근 몇년새만도 중국 공산당원 출신의 대만 망명자 롼밍은이 쓴 <덩샤오핑 제국 30년>(2016, 한울아카데미)과 미국의 동아시아 전문가 에즈라 보걸 하버드대 교수의 <덩샤오핑 평전-현대 중국의 건설자>(2014, 민음사)가 번역 출간됐다. 특히 보걸의 평전은 번역서 두께가 1116쪽에 이르는 두툼한 분량이다.
중국 건국 60돌을 맞은 2009냔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적 도시인 광둥성 선전을 방문한 덩샤오핑. 한겨레 자료사진
1979년 1월 중국과 미국이 수교를 한 직후 덩샤오핑 당시 중국 부총리(왼쪽)이 미국을 방문해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번에 나온 <설계자 덩샤오핑>이 이전 평전들과 가장 구별되는 대목은 객관성과 신뢰성이라는 게 지은이들의 자평이다.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우선 이 책은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덩샤오핑 및 그 가족들의 방대한 개인기록들 뿐 아니라,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 천윈 등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의 개인기록 문서 3300여 건을 처음으로 이용했다. 앞서 다른 평전들에선 볼 수 없었던 옛소련의 이런 자료들은 중국 공산당 핵심부가 공산주의를 배우고 개인숭배를 바탕으로 한 국가경영 모델을 학습한 과정, 흐루쇼프 이후 중소 갈등 상황에서 이들이 활약한 모습까지 내밀한 풍경을 타임캡슐처럼 생생하고 풍부하게 담은 정보의 보고다. 이런 문헌 근거를 토대로 지은이들은 덩샤오핑에 드리워진 명과 암을 가감없이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었다.
지은이들은 덩샤오핑에게서 3개의 얼굴을 본다. 전체 3부로 짜인 책의 순서이기도 한 볼셰비키(1부), 마오주의자(2부), 그리고 실용주의자(3부)다. 3개의 인격이 시간순으로 나타나지만, 이는 덩의 다면성이지 탈바꿈으로 해석될 일은 아니다. 경제발전 노선을 두고 고양이가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 향후 100년은 재능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기다린다는 ‘도광양회’, 중국인의 평균적 삶의 질이 향상된 ‘샤오캉’ 사회, 홍콩과 마카오에 이어 대만을 재통일하기 위한 ‘일국양제’ 원칙, 나아가 오늘날 중국 사회의 3대 금기인 타이완·티베트·톈안먼 등 이른바 ‘3T’ 문제에는 여전히 덩샤오핑의 흔적이 짙다.
1984년 덩샤오핑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원회 주석이 인민해방군 열병식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중국 광둥성 선전에 있는 등소평 동상. 출처 위키피디아
특히 지은이들은 “덩에 대한 연구서로 가장 잘 알려진 에즈라 보걸의 <덩샤오핑 평전>조차 (…) 사실, 그 책은 전혀 전기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92년에 걸친 덩샤오핑의 생애 중 마지막 27년에만 초점을 둔 점, 전기 작가가 아닌 정책분석가로서 저술하고 있는 점(실제로 보걸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분석관으로 일한 경력이 있다), 덩의 정치경력과 개인적 삶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러시아 기록문서에 접근하지 못한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덩의 반체체 인사 탄압 등 중대 과오들에 무비판적이고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꼽았다.
지은이들은 “우리 책은 20세기 후반 중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지도자에 대한 유일하게 완전하고 객관적인 전기”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 책이) 정치 팸플릿이 아니라 일반 독자들이 접근할 수 있으며, 재미있어 하고, 몰입할 수 있도록 이야기 형식으로 내놓은 다년간의 힘든 학술 연구의 결과물”이란 자부심에서다. 번역서로 전체 837쪽에 이르는 분량 중 ‘주석’과 ‘참고문헌’이 178쪽으로 전체의 20%를 차지하는 걸 보면, 지은이들의 자화자찬을 ‘허세’로 폄하할 것은 아닌 듯 하다. 한가지 분명한 건 이 책이 ‘20세기 중국사’와 같은 말이나 다름 없는 덩샤오핑의 극적인 생애를 마치 드라마를 보는 듯 섬세하고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