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선주 저작집 1~3
방선주선생님저작집간행위원회 엮음/선인·전 권 9만6000원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방선주’란 이름을 모를 수 없다. 한국 현대사와 관련해 가장 많은 사료들을 품고 있다고 알려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ion, 이하 ‘나라’)의 ‘터줏대감’으로 유명한 재미사학자 방선주(85) 박사는, 1980년대 이후 이곳에서 수없이 많은 새로운 사료들을 찾아내어 국내 한국 현대사 연구가 한 차원 높이 도약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방선주 박사가 그동안 내놨던 저작들을 한데 묶은 <방선주 저작집>이 최근 출간됐다. ‘방선주선생님저작집간행위원회’가 간행사에서 밝혔듯, 이 책은 “그의 학문적 업적을 기념하고 그가 한국 현대사 연구에 기여한 공로를 기념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지난 40여년 동안 사료 발굴 한 길을 천착해온 노학자의 노고를 기린다는 의미가 크다. 지난 12일 이화여대에서는 저작집 출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는데, 방명록에는 “아카이브에서 맺은 소중한 인연을 기억합니다”, “선생님의 도움 덕택에 박사 학위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따뜻한 환대와 지도에 감사드립니다” 등 많은 국내 연구자들이 방 박사와 맺은 인연을 되새기는 글들을 빼곡하게 적었다.
지난 17일 서울 강서구에 있는 어느 건물 로비에서 <한겨레>와 만난 방 박사는 “여지껏 내 연구를 제대로 정리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기억하고 찾아주니 고마울 따름”이라고 이번 저작집 출간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40년 동안 미국 국립 아카이브에서 한국 현대사 자료들을 발굴해온 재미사학자 방선주 박사가 17일 오전 서울 강서구의 한 건물에서 자신의 저작집 출간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자료 전문가로서 살아온 40년
방 박사는 1933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부친 방지일 목사와 조부 방효원 목사는 모두 중국 산둥성 선교 활동으로 한국 기독교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다. 방 박사는 5살 때 부친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칭다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1957년 한국으로 귀국한 뒤 숭실대에 편입해 중국 고대사를 공부하는 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64년 미국 시애틀의 워싱턴주립대학에 진학하면서 미국 생활을 시작했는데, 1979년 ‘나라’가 있는 워싱턴디시에 정착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한국 현대사 연구자, 그리고 자료 전문가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중국 고대사에서 한국 현대사로 연구 영역을 옮긴 데 대해 방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고대사에서는 이른바 ‘맛있는 국물’이 많이 나오지 않아요. 역시 현대사 영역에서 들춰볼 것들이 많지요. 그리고 제가 한국 사람이고, 저의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친척들이 모두 우리 현대사, 특히 일제강점기 등의 시대적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자연적으로 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지요.” 중국 고대사를 연구할 때에도 갑골문 등에서 나타나는 한국어와 중국어의 언어적 연관성을 파헤치는 데 주로 흥미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자신의 연원을 밝혀나간다는 측면에서 그 뒤에 매진한 그의 현대사 연구와도 묘하게 닮았다는 느낌을 준다.
‘방선주 저작집’은 그의 학은을 입은 국내 학자들이 뜻을 모아 출간됐다. 방 박사가 출간 기념식 때 작성된 방명록을 넘겨보며 자신과 인연을 맺은 학자들의 발자취를 훑어보고 잇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일제강점기와 미군 점령, 한국전쟁 등을 연달아 겪은 굴곡진 역사 덕택에 ‘나라’에는 한국 현대사를 말해주는 수많은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다. 1970년 후반 이 문서들이 비밀해제되어 공개되기 시작했지만, 당시로선 여기에 접근할 수 있는 한국 학자들이 극히 드물었다. “아카이브(‘나라’)에 처음 갔을 때, 한국 관련 자료들이 어디쯤 있는지 파악하는 데에만 하루 정도 걸렸어요. 그리고선 문서들을 하나씩 들춰보기 시작하는데, 이 단계에서부터 시간이 많이 걸렸죠.” 그는 1983년부터 국사편찬위원회 ‘국외사료조사위원’이라는 공식 직함을 얻어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수집해 국사편찬위원회, 군사편찬연구소,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등 국내로 보내온 자료들은 하나같이 국내 학계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것들이었다고 한다.
저작집에 실린 간행사는 “선생님이 한국현대사 연구자이자 자료 전문가로 이름을 얻게 된 계기는 1986년과 1987년에 쓴 2편의 자료 해제 겸 소개”라고 밝히고 있다. 하나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북한에서 노획한 이른바 ‘북한노획문서’에 대한 해제와 소개다. 당시 국내 학계는 브루스 커밍스 등 외국 학자들이 한국전쟁 연구에서 보여준 월등한 자료 접근 역량에 내심 좌절하고 있었는데, 방 박사의 “북한노획문서 소개는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지적 충격과 자극을 주었다.” 300만 페이지에 달하는 북한노획문서 전체를 두 번 이상 통람한 방 박사는 한국전쟁의 개전 책임이 북한에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또 아직 비공개 상태에 있던 노획문서들의 존재까지 파악해, ‘신노획문서’ 180상자를 새롭게 공개하도록 만들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북한노획문서를 중요하게 활용하는데, “대부분 선생님이 국사편찬위원회와 군사편찬연구소에 선별·수집해 보낸 문서들을 손쉽게 볼 수 있게 된 것”이라고 간행사는 지적한다.
‘방선주 저작집’은 그의 학은을 입은 국내 학자들이 뜻을 모아 출간됐다. 방 박사가 출간 기념식 때 작성된 방명록을 넘겨보며 자신과 인연을 맺은 학자들의 발자취를 훑어보고 잇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현대사 보기 위한 새로운 ‘문’ 열어
다른 하나는 미군정기 주한 미24군 정보참모부(G-2) 예하에 있던 군사실(軍史室) 자료에 대한 해제와 소개다. 해방 직후 “미군 정보당국이 수집한 다양한 정보보고들은 한국 측 자료로는 다가설 수 없는 현대사의 깊이와 진실들을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 민간인의 전화·편지·전보를 감청하던 민간통신검열단(CCIG-L)의 정보보고서, 주한미군 정보참모부의 일일보고서·주간보고서, 방첩대(CIC)의 보고서, 군사관의 인터뷰, 하지 장군의 정치고문 버치 중위의 내밀한 한국정치 비사 등 최고급 정보와 감춰진 진실들이 이 해제를 통해 알려졌다.”
이밖에도 방 박사가 ‘나라’에서 발굴해낸 자료들은 한국 현대사의 진실을 가리고 있던 온갖 문들을 열어제꼈다. 지난 40여년 동안 그의 손을 통해 국내에 수집·공개된 ‘나라’ 등의 문서는 150만장 이상이다. 간행사는 “미군정기 이래 한국전쟁기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 관련 자료들은 거의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쳐서 국내에 소개되었거나 입수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한다. 특히 그가 관심 가져온 주제들은 재미한인 독립운동, 해방 직후 한국 현대사, 한국전쟁,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이다. 박용만, 이승만, 서광범, 변수 등 재미한인들이 펼쳤던 독립운동의 역사가,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 요원이자 ‘백의사’ 암살단 조장이었다는 사실이, 일본군이 제도적으로 ‘위안부’를 동원하고 성노예로 착취했던 정황이, 문경 석달리 사건과 노근리 사건 등 한국전쟁 전후 벌어진 양민학살의 실상이, 사료의 힘으로 드러났다. 방 박사는 “당시 한국 정부들이 워낙 왜곡하고 감추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입을 딱딱 벌리며 ‘이런 일이 있었다니’ 흥분했다. 또 그 뒤로 아카이브에 와서 진실을 파보려는 노력들을 이어갔다”고 말했다.
40년 동안 미국 국립 아카이브에서 한국 현대사 자료들을 발굴해온 재미사학자 방선주 박사가 17일 오전 서울 강서구의 한 건물에서 자신의 저작집 출간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자신이 찾아낸 수많은 자료들 가운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냐고 물어보니,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던 방 박사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일 처음 찾아낸 사료를 묻는 우문에도 마찬가지. “하도 오래된 일들이라 이젠 기억도 잘 나지 않네요. 새로운 사료를 찾아냈을 때의 즐거움, 흥분 같은 것들만 기억납니다.” “그의 ‘최초’의 발견은 자기 과시나 과장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언론과 학계의 무관심과 무지 속에 종종 잊혀져 갔다”는 간행사 속 언급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어떻게 그런 자료들을 발굴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는 “40년이나 거기에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자료를 찾아내고픈 열정에 불타는 학자들에게 ‘도움말’을 달라고 하니, “지금 사람들이 우리보다 훨씬 낫다”며 손사래를 쳤다.
이제 방 박사는 더이상 ‘나라’에 출입하지 않는다. “더이상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신 “유럽에 가서 새로운 자료들을 찾아보고 싶다”고 했다. 이미 미국뿐 아니라 캐나다, 인도, 포르투갈, 뉴질랜드, 영국 등 국외의 수많은 아카이브들도 다녀봤던 그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한국인 포로들이 유럽 등지에 ‘노예’로 팔려간 기록에 특히 관심이 많다고 했다. 아흔을 바라보는 고령임에도 자료에 대한 열정은 전혀 식지 않았다.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쪽에서 15~16세기 한국 관련 자료들이 더러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안 찾아질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지만…. 그래도 자료를 찾아내는 데에는 내가 ‘감’이 조금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찾지 못하는 길을 통해 뭔가 건져낼 수 있지 않을까요? 일단은 독일과 프랑스의 내셔널 아카이브를 가보려고 합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