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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독재자 감별’ 리트머스로 민주주의를 지켜라

등록 2018-10-04 20:02수정 2018-10-04 21:02

미 하버드대 정치학자 2명
“선동적 포퓰리스트에 맞서
광범위한 연합전선 형성해야”
상호관용·제도적 자제 강조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우리가 놓치는 민주주의 위기 신호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어크로스·1만6800원

2016년 11월 미국 대선일. 정치 경력이라곤 전혀 없던 부동산 재벌이자 티브이(TV) 리얼리티 쇼 진행자 출신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공화당)가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환호와 경악이 엇갈렸다. 환호하는 지지자들의 반대편 반응이 아쉬움이나 슬픔이 아니라, 경악과 통탄이었던 것에 주목하자. 그것도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자국의 민주주의 전통에 자부심을 가져온 미국인 상당수는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절차로 진행된 선거 결과를 놓고 자괴감에 빠져들기도 했다. 트럼프의 당선은 많은 이들에게 어떤 징후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미국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의 공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을 계기로 민주주의 시스템의 작동원리와 취약점을 되짚고, 제도와 법률보다 실질적 규범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훨씬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책이다.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바로 그 규범이다. 상호 관용은 정치인들이 다른 집단과 그들의 의견도 인정하는 집단 의지이며, 제도적 자제는 자신에게 주어진 법적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태도라고 한다.

2015년 12월 15일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페네티안 호텔에서 열린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 토론회 시작에 앞서 마코 루비오(왼쪽부터), 벤 카슨, 도널드 트럼프, 테드 크루즈, 젭 부시 후보가 국기에 경례를 하고 있다. 트럼프를 제외한 나머지 후보들이 트럼프 광풍에 움츠러들면서 차례로 경선을 포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트럼프에게 대선 후보에 이어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말았다. 라스베이거스/EPA 연합뉴스
2015년 12월 15일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페네티안 호텔에서 열린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 토론회 시작에 앞서 마코 루비오(왼쪽부터), 벤 카슨, 도널드 트럼프, 테드 크루즈, 젭 부시 후보가 국기에 경례를 하고 있다. 트럼프를 제외한 나머지 후보들이 트럼프 광풍에 움츠러들면서 차례로 경선을 포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트럼프에게 대선 후보에 이어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말았다. 라스베이거스/EPA 연합뉴스

지은이들은 책에서, 독재자가 될 소지가 다분한 극단주의 포퓰리스트들이 어떤 조건에서 선출되는지, 선출된 독재자들이 어떻게 합법적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지를 세계 각국의 사례를 들어 생생히 보여준다. 앞서 2004년, 최장집 고려대 교수는 한국 헌정사상 최초의 정권 교체를 실현한 김대중 정부의 임기가 끝난 직후 펴낸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형식을 넘어 실질적 민주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미국 정치학자들이 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미국판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담론으로도 읽힌다.

대다수 사람은 국민이 민주적 가치를 지지하면 민주주의는 살아남고, 전제주의의 유혹에 빠지면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지은이들은 “그 생각은 틀렸다”고 단언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이 자신의 의지대로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며 그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란 얘기다. 어느 민주주의 사회나 잠재적 대중 선동가는 있으며, 때로 대중의 감성을 건드리며 득세한다. 그러나 어떤 사회에선 기성 정치인들이 경고 신호를 인식하고 그런 인물이 권력의 중앙에 들어서지 못하도록 고립시키고 무력화한다. “극단주의자의 호소에 대한 대중의 반응보다 더 중요한 것은 특히 정당이 사회적 거름망으로 기능할 수 있는가” 여부다. 그런 점에서 “정당은 민주주의의 문지기”이다.

2016년 12월 오스트리아 대선 결선투표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전 녹색당 당수 알렉산더 판 데어 벨렌(72·가운데)이 여론조사 때 줄곧 앞섰던 극우 자유당의 노르베르트 호퍼를 누르고 승리한 것으로 나타나자 빈에서 지지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있는 모습. 중도 좌·우 성향의 전통 깊은 정당들이 낮은 지지율로 집권할 전망이 힘들자 극우파의 집권을 막기 위해 급진적 진보성향의 후보를 밀어준 결과였다. 빈/AP 연합뉴스
2016년 12월 오스트리아 대선 결선투표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전 녹색당 당수 알렉산더 판 데어 벨렌(72·가운데)이 여론조사 때 줄곧 앞섰던 극우 자유당의 노르베르트 호퍼를 누르고 승리한 것으로 나타나자 빈에서 지지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있는 모습. 중도 좌·우 성향의 전통 깊은 정당들이 낮은 지지율로 집권할 전망이 힘들자 극우파의 집권을 막기 위해 급진적 진보성향의 후보를 밀어준 결과였다. 빈/AP 연합뉴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언제 어떻게 망가지는 걸까? 지은이들은 “모든 민주주의는 유사한 방식으로 무너진다”며 ‘잠재적 독재자 감별법’을 만들었다. 첫째, 말과 행동으로 민주주의 규범을 거부하는가. 둘째, 경쟁자의 존재를 부인하는가. 셋째, 폭력을 용인하거나 조장하는가. 넷째, 언론의 자유를 포함해 반대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 드는가. 이런 기준에서 보면, 히틀러와 무솔리니 같은 파시스트, 칠레의 알베르토 후지모리, 2016년 오스트리아 대선 때 극우 자유당 후보를 비롯해 유럽의 극우 포퓰리즘 정치인들이 공통으로 해당한다. 지은이들은 칠레에서 군부 쿠데타로 무너진 좌파 아옌데 정권,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정권도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

더 놀라운 것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2016년 대선 전 과정과 취임 이후까지도 “독재자를 구별하는 우리의 ‘리트머스 테스트’ 네 항목 모두에서 양성반응을 보였다”는 것. 선거에 패하더라도 결과에 승복하겠다는 말을 끝내 하지 않았고(민주주의 규범 거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출생지를 둘러싼 논란에 집요하게 불을 지폈으며(경쟁자 부인), 자신을 비판하는 시위자들에 대한 폭력을 부추기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을 뿐 아니라(폭력 용인), 경쟁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과 미국 주류 언론에 대한 협박(반대자 억압)을 이어갔다.

지은이들은 ‘민주주의 수호’가 때로 ‘민주주의 전복’의 명분으로 활용되는 역설적 상황에도 주목했다. “잠재적 독재자는 자신의 반민주적 조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 위기나 자연재해, 특히 전쟁과 폭동, 테러와 안보 위협을 구실로 삼는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한 직후 국회의사당 화재 사건을 구실로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긴급조치와 수권법을 통과시켜 나치 권력의 토대로 삼은 일이다. 최근의 사례도 터키의 에르도안 정권, 러시아의 푸틴 정권 등 세계 전역에서 넘쳐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누구보다 바로 한국 시민들이 불과 몇 년 전까지도 반세기가 넘도록 물리게 겪어온 일이다.

1940년 6월 독일 뮌헨에서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왼쪽)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무개차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1940년 6월 독일 뮌헨에서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왼쪽)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무개차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지은이들은 아무리 잘 설계된 헌법이라도 민주주의를 지킬 수는 없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의 붕괴’를 경험한 유럽과 중남미 여러 나라도 훌륭한 헌법이 있었으며, 미국 역시 20세기 이후만도 수차례의 위기를 맞았던 경험이 그 근거다. 실제로 미국에선 20세기 전반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루스벨트 행정부의 권력이 전례없이 비대해지고 3000건이 넘는 행정명령이 남발됐다. 1950년대 매카시즘에 이어, 1960~70년대엔 닉슨 행정부의 전제주의가 결국은 워터게이트 사건과 현직 대통령의 사임으로 이어졌다.

두 정치학자는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며 자국(미국)의 현실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반 트럼프 세력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광범위한 연합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 정치 노선이 비슷한 집단 간의 연합만으로는 민주주의를 온전히 지켜낼 수 없다. 가장 효과적인 형태는 서로 이질적인 집단이 하나로 뭉치는 연합이다. 이러한 연합은 친구가 아니라 경쟁자들 사이에서 이뤄진다.”

지은이들의 위기감이 우리에겐 격세지감이 된 것 같지만 여전히 타산지석이기도 하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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