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우리는 환자가 되었나
-탈모, ADHD, 갱년기의 사회학
피터 콘래드 지음, 정준호 옮김/후마니타스·1만8000원
의사들 사이에 이런 말이 있다. 대학병원에서 아무리 다양한 전공을 배우더라도, 개원을 하면 결국 3가지 중 하나를 하게 된다. ‘미용, 감기, 통증.’ 전염병이나 암 같은 생명을 위협하는 중증질환은 3차 병원인 상급종합병원에서 전담한다. 모세혈관처럼 동네 구석구석 뻗어 있는 1차 병원들은 대부분 피부과, 성형외과, 이비인후과이고, 여드름이나 감기처럼 병원에 가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도 이젠 ‘환자’들이 병원의 문을 두드리는 이유가 됐다. 그러자 이런 흐름의 반작용으로 아동 예방접종이나 병원 치료 같은 의학 자체를 거부하는 ‘안아키’ 같은 극단적 반의학 운동도 퍼지고 있다.
피터 콘래드 미국 브랜다이스대학 교수(사회학)는 의료사회학자로 이 분야를 30년 가량 연구해왔다. 그는 2007년 출간한 <어쩌다 우리는 환자가 되었나>(원제는 ‘사회의 의료화’)에서, 이전에는 의료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을 의료의 대상으로 삼는 ‘의료화’ 현상의 역사와 논리를 짚는다.
알코올의존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우울증, 수면 장애, 노화, 비만, 성형수술 등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의료인의 진단과 관리가 필요한 대상이 된 의료화 사례의 목록은 끝이 없다. 그렇다면 이런 새로 생겨난 의료행위들이 모두 실체가 없는 의사의 거짓말이라는 것인가. 지은이는 자신이 ‘진짜’ 의학을 판별할 능력도, 그럴 의지도 없다고 강조한다. 다만 의료화가 어떤 방식으로 확대돼 왔는지, 의료화를 추진하는 동력은 무엇인지, 의료화가 발생시키는 사회적 결과들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1997년 미국 식품의약청(FDA)의 승인을 받은 대표적 탈모 치료제 ‘프로페시아’는 탈모를 의료화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1998년 호주의 한 잡지에 실린 “오늘 시작하세요. 더는 탈모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라는 문구가 삽입된 프로페시아 광고. 후마니타스 제공
한 가지 더. 의료사회학을 의료화로 이득을 보는 의사나 제약회사와 같은 전문가 집단을 악마화하는 음모론에 동조하는 학문으로 의심할 수도 있겠다. 지은이는 오히려 그런 단선적인 시선이 현실과 거리가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근본적인 문명 비판가였던 이반 일리치가 “의료 제국주의”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의료화의 가장 중요한 열쇠를 의사들이 쥐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는 그것보다 복잡하다. 지은이가 보기에 의사와 제약회사만이 아니라 사회운동 세력과 환자 단체, 환자 같은 비의료인들도 의료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람들은 탈모를 치료할 수만 있다면, 아이들의 키를 자라게 할 수 있다면, 더 볼륨감 있는 몸매를 만들 수 있다면 얼마가 됐든 지갑을 열 용의가 있었다.
대표적 사례가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다. 미국에서 이 장애는 1950년대에 들어서 아동에 한해 병으로 진단하기 시작했다. 명칭도 ‘가벼운 뇌 손상’부터 ‘운동과다증’ 등으로 확정되지 않고 계속 흔들렸다. 지은이가 주목하는 지점은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의 범위가 아동에서 성인으로 점점 확대되는 대목이다. 1980년대부터 자신이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환자였다는 각종 저서, 장애 관련 연구를 대서특필한 언론 보도 등으로 자신을 환자라 생각하는 성인이 늘기 시작했다. 장애를 질병화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의료인이 아닌 환자 협회와 제약업체였다. 가장 큰 압력 단체인 환자 협회는 제약회사에 매년 수백만 달러를 교육 보조금 명목으로 받아온 것이 드러나기도 했다. 결국 성인에게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를 진단하기 시작하자, 기존 제약 시장 규모는 두 배 이상 커졌다.
지은이는 특히 성인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가 업무 저성과를 극복하거나 정당화하는 “저성과의 의료화”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짚는다. 한 제약회사가 만든 치료약 광고에 등장한 남성은 주의가 산만해 차 열쇠를 잃어버리거나, 업무를 제시간에 끝내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결국,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도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지점이 있었기에 삽시간에 퍼져나갔다는 말이다.
이처럼 수많은 신체 현상이 의료의 대상으로 포섭됐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매우 드물다. ‘탈의료화’의 사례로 들 수 있는 건 자위행위나 동성애 정도. 죄악, 비도덕적 행위, 질병으로 여겨져 온 자위는 20세기 중반 킨제이 보고서로 남성의 90%가 자위를 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더는 치료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동성애 또한 비슷한 과정을 밟았다. 동성애는 오스카 와일드의 사례에서 보듯이 19세기 중반까지 범법 행위로 처벌됐다. 흥미롭게도 헝가리 의사인 카를 벤케르트가 1896년 ‘동성애’(homosexuality)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이유는 프러시아의 가혹한 동성애 처벌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동성애가 선천적이기 때문에 법적 처벌은 부당하며 효과도 없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후반 게이 해방운동가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미국정신의학회는 1973년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에서 동성애를 질병으로 보는 대목을 삭제했다. 이후 동성애를 질병으로 보지 않는 것은 상식이 되었지만, 언제든 의료화의 소용돌이로 다시 끌려들어갈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
<어쩌다 우리는 환자가 되었나>의 저자 피터 콘래드 미국 브랜다이스대학 교수(사회학). 후마니타스 제공
그렇다면 대체 의료화가 뭐가 문제라는 걸까. 지은이가 말하는 의료화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점은 질병을 사회적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본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성형수술은 특정한 얼굴이나 몸의 형태를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사회적 기준은 그대로 둔 채 거기에 몸을 맞추는 행위다. 아이들이 학업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가정과 학교 환경을 개선하는 것보다는, 아이들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로 진단하고 약을 먹이는 것이 더 쉬운 방법이다. 하지만 이런 보수적인 접근 방식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을 은폐한다.
앞으로 생명공학이 발달할수록 의료화는 더욱 극단적으로 진행돼, 인간의 몸이 계급 간의 전쟁터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은이는 우려한다. 일부에선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탈모나 질병 예방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뛰어난 외모를 가지도록 유전자를 조작할 수 있는 기술이 나올 것이라 예언하기도 한다. 그렇게 된다면, 키가 작거나 얼굴이 못생긴 것까지도 ‘치료할 수 있는데 하지 않거나 못한’ 장애나 질병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 같은 고가의 고도 의료 서비스에 접근할 수 없는 저소득층이나 저개발국가의 사람들은 몸으로 드러난 자신의 계급을 숨길 수 없는, 영화 <가타카> 같은 세상이 올지 모른다. 물론 이미 지금도 돈 많은 사람이 날씬하고 젊고 건강하고 오래 사는 세상이긴 하지만.
거실에 사는 코끼리처럼 어느새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큰 방을 차지한 의료 산업. 들어올 때야 작았지만, 이미 커져 버린 코끼리를 내보내려면 집을 부숴야 할 텐데, 과연 그게 가능할지.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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