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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우리 단지의 ‘황희 정승’, 관리소장이 말하는 아파트 문화

등록 2018-09-06 20:37수정 2018-09-06 20:45

20년 관리소장으로 일해온 김미중씨
주차, 층간소음…‘민원’ 가득한 아파트
따로 또 같이 살아야 하는 운명
체온 느낀다면 마음 더 너그러워져

따로, 또 같이 살고 있습니다
-아파트 관리소장의 각양각색 주민 관찰기

김미중 지음/메디치·1만4000원

“저한테는 너무 친숙한 공간인 걸요, 하하.”

사진 촬영을 위해 어둑한 옥상의 계단을 오르다, “발 밑 조심하시라” 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다. 일반인들의 발길이 닿기 힘든, 전기·소방·급수·통신 등 각종 설비들로 가득한 공간이 평소 그의 주무대라는 것을 깜빡했다. 20여년 동안 아파트 관리사무소장으로 일해온 김미중(48)씨는 주변의 아파트 단지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파트란 공간은 참 신기해요. 집 안에만 있으면 마치 저 혼자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결국엔 수많은 사람들이 다 저렇게 다닥다닥 붙어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거잖아요.”

김미중씨는 최근 <따로, 또 같이 살고 있습니다>란 제목의 책을 펴냈다. 부제 그대로 ‘아파트 관리소장의 각양각색 주민 관찰기’다. 전산학원 강사였던 김씨는 1999년 당시 여성으로선 흔치 않게 아파트 관리소장 일을 시작했다. 지난 20여년 동안 근무한 아파트만도 천안, 평택, 아산 등 8곳에 이른다. 김씨는 남편 남낙현씨가 주도하는 독서모임에서 글쓰기 훈련을 하면서 그 경험들을 글로 다듬었다고 한다.

“원래 관리소장의 일은 아파트 ‘공용’ 부분 관리에요. ‘주민 안전’을 첫번째 목표로 삼아서 전기, 소방, 급수 등 각종 시설물을 관리하는 거죠. 그런데 막상 일하다 보면, ‘전유’ 부분(개별 세대)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훨씬 더 많이 만나게 돼요. 대표적인 게 층간소음이나 주차, 흡연 문제로 벌어지는 분쟁들이에요. 대개 참다 못한 누군가가 관리소로 ‘민원’을 넣는 식으로 문제가 불거지거든요.”

20여년 동안 아파트 관리사무소장으로 일해온 경험을 책으로 펴낸 김미중씨가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옥상에서 주변 아파트를 둘러보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20여년 동안 아파트 관리사무소장으로 일해온 경험을 책으로 펴낸 김미중씨가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옥상에서 주변 아파트를 둘러보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책 속에서 그가 풀어놓은 경험들은, 아파트에 살아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직간접적으로 마주해본 일들이다. 주차난 때문에 벌어지는 불법주차 시비, 맑은 날 윗층에서 베란다를 물청소하는 바람에 물이 들이친 아래층, 몇 대 없는 러닝머신을 두고 벌어지는 헬스장의 신경전, 하필 활발하게 뛰어다닐 시기의 아이들이 있는 집을 위층으로 둔 고3 수험생이 있는 집, 단지 내 분수에서 나는 물소리 때문에 잠 못 드는 아저씨, 말라비틀어진 나무를 베어낼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주민들 사이에 벌어지는 논쟁…. 어떤 경우는 이른바 ‘진상’(꼴불견 행위)을 탓하면 되지만, 많은 경우가 그렇지 않다는 데 어려움이 있다. 각자 서 있는 입장에서 나오는 저마다의 합리적인 주장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여년 동안 아파트 관리사무소장으로 일해온 경험을 책으로 펴낸 김미중씨가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옥상에서 주변 아파트를 둘러보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20여년 동안 아파트 관리사무소장으로 일해온 경험을 책으로 펴낸 김미중씨가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옥상에서 주변 아파트를 둘러보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그런 면에서 ‘택배 차량 진입 금지’ 논란이 특히 눈에 들어온다. 최근 많은 아파트 단지들이 지상을 공원화하고 차량 통행을 금지하면서, 택배 차량의 단지 내 진입 여부를 두고 여기저기 분쟁이 잦다. 지은이는 제3자 입장으로 분쟁 당사자의 주장들을 차근차근 들어본다. 아이의 안전을 염려하는 입주자들은 “탑차를 낮게 개조해 지하로 다니거나, 택배를 집 밖에서 받으면 되지 않냐” 한다. 반면 다른 입주자들은 “집에서 택배를 받는 것은 내 권리인데 왜 그걸 침해하느냐, 무거운 물건은 어떻게 옮기란 말이냐” 반박한다. 관리소에서 “민원이 많으니 오후 3시 이전에 배달을 끝마쳐달라”, “탑차를 개조하면 안 되겠냐” 하면, 택배 기사들은 “우리더러 아예 먹고 살지 말란 얘기”라고 말한다. 의외로 결론은 싱겁다. “놀이터 근처에는 차량 통행을 완전히 차단하고 경비 아저씨가 적극적으로 안전을 살핀다. 주민들에게는 무인택배함 사용을 유도하고 무거운 물건만 집에서 받으시라 홍보한다”는 것이다.

“층간소음 문제도 그렇지만, 사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정답’이란 게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관리소장으로서 김씨는 기본적으로 원리원칙에 충실하면서도, “이 말도 옳다, 저 말도 옳다”고 다독이는 ‘황희 정승’ 같은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정답을 찾을 수는 없지만 내 마음가짐은 바꿀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 이때 중요한 것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서로의 체온을 느끼는 것이라 했다. 예컨대 관리소에서 아무리 “담배 피우지 마시오”란 협박성 문구를 붙여도 요지부동이었던 흡연자들이, “아이가 천식이 있어서 담배 연기를 맡으면 많이 아프다”는 주민의 손편지가 붙은 뒤로는 이전보다 담배를 크게 줄였다. 층간소음으로 갈등하던 아래윗집이 함께 차를 마시며 ‘생활수칙’을 공유한 사례도 있는데, 그들은 “소음이 크게 줄진 않았지만 스스로의 마음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지난 4월 ‘택배 차량 출입 금지’로 논란이 일었던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신도시 아파트 단지에 택배가 쌓여 있다. 아파트는 우리 사회의 주된 거주 형태로 자리잡았지만, 그 안에서 풀리지 않는 갈등이 끊임없이 빚어진다. 연합뉴스
지난 4월 ‘택배 차량 출입 금지’로 논란이 일었던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신도시 아파트 단지에 택배가 쌓여 있다. 아파트는 우리 사회의 주된 거주 형태로 자리잡았지만, 그 안에서 풀리지 않는 갈등이 끊임없이 빚어진다. 연합뉴스

“주민들이 관리소에 ‘민원’을 제기하는 것도, ‘내 얘기 좀 들어줘’ 성격이 강해요. 그렇게 누군가 하소연을 들어주면, 마음이 좀 풀어지거든요.” 이번에 책을 낸 것도, 관리소장으로서 그런 위로를 좀 더 널리 전해주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아파트는 어쩔 수 없이 서로 피해를 주고 또 받는 공간이잖아요. 지난 20여년 동안 아파트 문화가 갈수록 각박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껴요. 2010년대 들어서야 이전에 없던 층간소음 등 다양한 분쟁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거든요. 그래도 우리는 모두 체온을 가진 사람들이니까, 체온과 체온이 만나면 앞으로도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여태까지 우리 사회가 아파트를 많이 짓는 데에만 골몰했다면, 이제는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지 ‘아파트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주력해야죠.”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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