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강명관의 고금유사
173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사신으로 갔던 황자(黃梓)는 자신이 경험했던 중국의 상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상인은 사민(四民) 중 하나이다. 예로부터 장사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 꼭 비천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전포(廛鋪)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거개 용렬한 무리가 아니다. 그중에는 높은 벼슬아치 집안 사람도 있다. 이런 까닭에 사람들은 장사치라고 하여 업신여기지 않는다.”
황자는 상인이 천하지 않다는 예로 정세태(鄭世泰)를 든다. 정세태는 조선에 비단을 수출하는 상인이었다. 조선은 1년에 10만 냥 정도의 은을 북경으로 반출했는데, 그것은 거의 모두 정세태 집안으로 흘러들어갔다. 조선과의 무역으로 부를 쌓아올린 정세태의 자질(子姪)들 중에는 과거에 합격한 사람도 있어 그의 집 문 앞에 ‘괴원(魁元, 장원급제)’이란 현판까지 걸어놓았다고 한다. 황자는 이런 까닭에 중국에는 상인을 천시하는 풍조가 없다고 말한다.
황자로부터 43년 뒤 부사로 북경에 갔던 이갑(李岬)은 자신의 여행기에서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수공업 제품이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을 입이 닳도록 말한 뒤 수공업자들도 천시를 받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한다. “수공업자들도 모두 우리나라의 천류(賤類)와 같지 않다. 사민의 하나로 대우하고, 조정의 벼슬아치들도 비천하게 여기지 않으므로 그 직업이 널리 전해진다. 더러는 유식한 사람도 수공업자를 많이 거느리고 기술서적을 시렁 가득히 채워두고 있다. 야금술(冶金術)만 하더라도, 대장간을 경영해 얻는 이익과 쇠를 녹이고 불리고 연마하는 기술을 모두 철저하게 궁리한다. 이런 까닭에 물리(物理)를 따져 알아내는 일과 물건을 정교하게 만드는 기술이 오묘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로 보건대, 우리나라 수공업자처럼 멍청하고 거칠고 형편없는 솜씨는 천하에 다시없을 것이다.”
조선에는 정세태처럼 큰 상인도, 정교한 기술을 자랑하는 수공업자도 있을 수 없다. 왜인가? 사회적으로 천시하기 때문이다. 한번 천한 장사치가 되면, 한번 천한 수공업자가 되면, 본인은 물론 대대손손 천대의 구렁텅이에 떨어진다. 아무리 똑똑해도 과거급제도 벼슬자리도 그의 몫이 아니다. 그러니 누가 상업과 수공업을 보람으로 삼겠는가? 한마디로 조선은 사회적 이동성이 0%인 후진적 세습사회였던 것이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어떤 대형교회의 목사직 세습을 보니, 대한민국의 사회적 이동성 역시 거의 0%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모두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저들은 뻔뻔스럽게 그냥 그렇게 한다. 황자나 이갑처럼 북경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청(淸)의 사회적 이동성이 크다는 것, 또 그것이 번영의 기초가 되고 있다는 것을 번연히 알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들은 조선사회를 바꾸려 들지 않았다. 지금이 조선시대인가? 대한민국 사회가 세습사회, 아니 신분사회가 되어 가는데, 이 나라 정치는 이 문제에 대해 정말 조용하구나. 정말 열 받는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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