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단어처럼, 음식의 풍미를 조합해보자

등록 2018-08-30 19:43수정 2018-08-30 19:54

음식연구가 니키 세그니트
식재료의 풍미와 그 조합
한 권의 사전처럼 총정리
풍미사전-창의적인 요리사를 위한 맛의 조합과 조리법
니키 세그니트 지음, 정연주 옮김/컴인·4만5000원

사람이 혀로 느낄 수 있는 ‘맛’(taste)은 단맛, 짠맛, 신맛, 쓴맛, 감칠맛 등 다섯가지로 제한되지만, 우리는 그보다 더 넓은 범주에서 맛을 느끼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후각 신경을 비롯해 고추에서 느껴지는 매운 감각, 레드 와인을 마실 때 입술이 오그라드는 느낌 등 식재료가 자극하는 ‘삼차 신경’에 기대는데, ‘풍미’(flavor)란 말은 그런 넓은 범주의 맛을 지칭하기에 적절한 말로 쓰일 수 있다.

영국 출신의 음식 전문가 니키 세그니트가 쓴 <풍미 사전>은 여러 식재료들이 전해주는 풍미들을 분류하고 묶어서 사전처럼 제시한 책이다. 지은이는 자신이 설정한 16가지의 풍미 군(群) 아래에 99개의 식재료들을 망라했는데, 식재료 고유의 풍미를 넘어서서 서로 다른 식재료들이 어울렸을 때 어떤 맛을 이루는지 파고든 것이 무엇보다 독특하다. 원제에 들어 있는 ‘시서러스(thesaurus)’는 동의어, 유의어, 반의어 등 낱말들 사이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사전을 가리키는 말이다.

첫 장을 펼치면 색색깔로 구획된 커다란 원을 만날 수 있는데, 이 ‘풍미 바퀴’(flavor wheel)는 지은이가 풍미를 분류한 전체 구조를 한눈에 보여준다. 초콜릿, 커피, 땅콩이 포함된 ‘구운 향’에서 시작하는 풍미 바퀴는, ‘고기’, ‘치즈’, ‘흙냄새’, ‘겨자’, ‘유황’, ‘바다 냄새’, ‘염장과 염지액’, ‘풋내와 풀 향’, ‘짜릿한 향신료’, ‘숲 향’, ‘신선한 과일 향’, ‘녹진한 과일 향’, ‘감귤류’, ‘울타리와 덤불’, ‘꽃 향 과일’ 등의 차례로 한 바퀴를 돌아 다시 ‘구운 향’으로 돌아온다. “각 군은 인접한 군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련이 있으며, 따라서 보색처럼 대응하는 360도 스펙트럼”이 된다. 예컨대 ‘감귤류’에는 오렌지, 레몬, 카다멈 등이 들어가는데, 카다멈을 보면 다음 항목인 ‘울타리와 덤불’에 처음 등장하는 로즈메리와 공통되는 풍미 화합물을 지니고 있는 식이다.

여러가지 식재료들은 각자의 풍미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 어떻게 어울리느냐에 따라 또다른 풍미를 낸다. 출처 게티이미지
여러가지 식재료들은 각자의 풍미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 어떻게 어울리느냐에 따라 또다른 풍미를 낸다. 출처 게티이미지

길지 않은 서술 속에 식재료가 가진 풍미를 정확히 잡아낼 뿐 아니라 자신의 직접 경험을 통해 여러가지 풍미의 조합을 풀이해내는 지은이의 실력이 놀랍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좋다’고 느껴왔던 풍미의 조합을 ‘역시나’ 하고 확인받는 재미도 쏠쏠하다. 책 속에는 단 한 장의 그림도 없지만, 읽으면서 군침이 쉬지 않고 흐르는 걸 감수해야 한다.

책 속 내용을 몇 가지 살펴보자. “땅콩은 본래 풋내가 나는 식물이므로 사실 볶기 전에는 초콜릿과 그다지 잘 어울리지 않는다. 땅콩과 초콜릿의 조합이 성공할 수 있는 건 땅콩을 볶는 동안 형성되는 피라진이 초콜릿의 구수한 풍미와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구크러스터’나 ‘스니커즈’를 통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맛의 조합이 아닌가. “천국 같은 조합”인 ‘초콜릿과 헤이즐넛’은 또 어떤가?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에서 코코아 품귀 현상이 일어나, 사람들이 코코아 대신 헤이즐넛 가루를 써서 초콜릿의 부피를 늘리려고 시도했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잔두야’라는 딱딱한 덩어리인데, 1950년대 혼합물을 부드럽게 만드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병에 담겨 팔리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악마의 잼’으로 불리는 ‘누텔라’다.

‘풍미사전’을 쓴 음식 전문가 니키 세그니트. 출처 nikisegnit.com
‘풍미사전’을 쓴 음식 전문가 니키 세그니트. 출처 nikisegnit.com

“생땅콩에서는 콩 내음이 난다. 굽거나 볶으면 달콤한 맛과 은은한 초콜릿 및 고기 향, 그리고 식물성 풍미가 깔린다. 기름진 고기나 달콤한 조개 및 갑각류, 사과나 라임 등 새콤한 과일과 잘 어울리는 매우 복합적이고 만족스러운 풍미를 선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땅콩과 라임’의 조합인데, “멕시코에서는 라임과 고추로 맛을 낸 봉지 땅콩이 인기를 누리며, 껍질째 돼지기름에 튀기고 뜨거울 때 건져 컵에 담은 다음 라임즙을 뿌린 땅콩을 노점에서 사먹을 수 있다. 땅콩과 라임은 태국과 베트남에서 매우 흔한 조합으로 국수 요리나 수프 혹은 샐러드에 고명으로 사용한다.”

니키 세그니트가 만든 ’풍미 바퀴’. 컴인 제공
니키 세그니트가 만든 ’풍미 바퀴’. 컴인 제공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은 식재료도 꽤 있지만, 이처럼 지은이가 다루는 음식의 범주는 전세계적이라는 것도 큰 장점이다. 그런 면에서 ‘소고기와 배’ 조합이 특히 눈에 띄는데, 지은이가 든 두 가지 사례가 모두 한국 음식인데다 그 내용도 매우 정확해서다. “육회는 날것인 안심 부위를 잘게 다져서 간장, 참깨, 마늘, 잔파, 고추에 재워서 채 썬 동양 배와 가끔 잣을 약간 곁들여서 낸다. (…) 불고기는 얇고 길게 썬 소고기를 간 배와 레몬즙, 청주, 참기름, 참깨, 마늘, 간장, 설탕에 몇 시간 재운 다음 빠르게 볶아서 만든다.”

‘감자와 달걀’의 조합은 “소수 권력층이 되지 않아도 왕처럼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가장 간단하고 저렴한 증거물”이라거나, “돼지고기에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많은 마늘을 짝지어주자. 이들은 서로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 등 유머가 넘치는 말재주마저도 일품이다.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과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 모두가 오래 두고 뒤적여볼 만한, 제목 그대로 알짜배기 ‘풍미 사전’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뉴진스 김밥·삼계탕·만둣국 선결제…“함께 힘내요” 1.

뉴진스 김밥·삼계탕·만둣국 선결제…“함께 힘내요”

신라왕실 연못서 나온 백자에 한글 ‘졔쥬’ ‘산디’…무슨 뜻 2.

신라왕실 연못서 나온 백자에 한글 ‘졔쥬’ ‘산디’…무슨 뜻

우리가 지구를 떠날 수 없는, 떠나선 안 되는 이유 3.

우리가 지구를 떠날 수 없는, 떠나선 안 되는 이유

윤종신·김이나 등 음악인 762명 “윤석열 탄핵·체포하라” 4.

윤종신·김이나 등 음악인 762명 “윤석열 탄핵·체포하라”

중립 기어 밟는 시대, 가수 이채연의 ‘소신’을 질투하다 5.

중립 기어 밟는 시대, 가수 이채연의 ‘소신’을 질투하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