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사상사
응웬 따이 트 편저, 김성범 옮김/소명출판·3만6000원
사상은 역사 속에서 영근다. 유럽 중심의 근대 세계사에서 열강의 지배를 받았던 지역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나름의 사상사를 고찰하는 것이 큰 과제로 떠올랐다. 오랫동안 중국의 지배와 영향 아래 있었고 열강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거쳐, 해방 뒤 분단과 전쟁을 겪은 베트남의 역사는 우리나라와 많이 닮았다. 그렇다면 베트남의 역사적 경험은 과연 어떤 사상을 낳았을까? 한국 사상사와 베트남 사상사는 서로에게 필요한 자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국내에선 찾아보기 힘들었던, 베트남 사상의 역사를 담은 책이 나왔다. <베트남 사상사>는 베트남 전쟁이 막바지였던 1970년대 베트남사회과학한림원 ‘베트남사상역사연구실’ 소속의 학자들이 베트남 사상의 역사를 종합하기 위한 목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을 담은 책이다. 고대부터 18세기까지의 시기를 다룬 1권이 베트남에서 1993년에 출간됐는데, <베트남 사상사>는 이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베트남 사회과학한림원 철학원에서 전임연구원을 지낸 바 있는 옮긴이 김성범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이 책은 베트남 내부에서 자신들의 사상사를 정리한 유일한 책”이라고 밝혔다. 2권은 19세기부터 베트남 공산당 창건까지의 시기를 다룬다고 한다.
베트남 호치민시 중앙에 세워진 베트남의 전쟁영웅 쩐 꾸옥 뚜언의 동상. 출처 위키피디아
베트남은 중국과 인도 두 거대 문명권 사이에 위치해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 고유의 특징을 간과하곤 한다. 봉건체제에서 유·불·도 사상이 유입되어 나름의 영향력을 발휘해온 역사 자체는 동아시아 전통세계의 전형적인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이 책은 베트남 고유의 철학사상의 특징을 ‘나라사랑’이라는 말로 압축해 제시한다. ‘나라사랑’은 베트남 전체 역사를 일관되게 흐르는 한가닥 ‘빨간 실’과 같다.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강력한 적들의 침략을 받았으며 외세의 지배를 천 년 동안 당하는 설움과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독특한 ‘나라사랑주의’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천 년 동안 중국에 지배당했던 ‘북속’ 기간, 세 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략과 또다시 찾아온 중국의 지배, 서구 열강인 프랑스의 식민 지배 등의 역사적 경험은 그 주된 배경이다.
베트남 레 왕조의 건국 공신인 응웬 짜이의 초상.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나라사랑’이란 것이 과연 ‘주의’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이 나올 법하다. 옮긴이는 “여기서 말하는 ‘나라’(nuoc·원래는 물이라는 뜻의 베트남어)는 공동의 삶터를 가리키는 말로, 한자 문명권에서 통용되던 ‘나라’(國)나 전통사회의 혈연 공동체, 서구 근대에서 나온 민족이나 국가 개념 등과는 다르다. 척박한 자연환경과 잦은 외세의 침략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베트남 고유의 가치관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근현대 격동기에도 베트남 사람들은 서로 분열하다가도 외부의 위협이 나타나면 자신의 입장을 “내려놓고” 하나로 뭉치는 모습을 줄곧 보여줬는데, 아예 이것을 자신들의 역사적 정체성을 밑받침하는 하나의 사상으로 만들어내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나름의 국가와 문화를 이루고 있다가 천 년 넘게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된 베트남은 중국의 봉건체제와 유·불·도 3교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고, 이런 한화(漢化) 경향과 여기에 맞선 반(反)한화가 동시에 진행됐다. 특히 반한화는 “독립과 자주에 대한 의식, 삶의 풍속에 대한 의식” 등을 포괄하는데, 938년 독립과 응오 왕조의 성립은 그 결실이었다. 이 책은 쩐 왕조 때 몽골의 침략을 세 차례나 이겨낸 장군 쩐 꾸옥 뚜언을 주요 사상가의 반열에 올려놓는데, 그가 “인민이 주인이 되어 주권과 독립을 보호한다”는 베트남 고유의 사상을 제시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명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고 레 왕조를 세우는 데 큰 힘을 쓴 유학자 응웬 짜이를 15세기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꼽기도 하는데, 그 맥락도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응웬 짜이가 쓴 ‘평오대고’라는 저술에 대해서는 “세계 민족해방전쟁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출현한 한 나라의 독립선언서”라고까지 평가한다.
응웬 짜이의 경우에서 보듯 15세기까지만 해도 유교는 ‘인의’란 가치로 사람들을 묶어낼 수 있었으나,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쌓여가는 사회경제의 모순들을 감당하긴 역부족이었다고 한다. “나라가 사회와 대립하자 나라에는 농민봉기의 풍조가 일어났다.” 16세기의 대표 사상가로 꼽히는 응웬 빈 키엠은 응웬 짜이가 보여준 ‘나라와 인민을 사랑하는’ 지식인의 전통을 이었지만, “사회 활동에서 인간의 주관적 능동성을 부인하는 길로 나아갔다.” 변란의 시기였던 18세기에 이르러서는, 한문 저술들을 통해 서양의 지식체계를 접했던 레 뀌 돈, 기존 지식인들과 달리 사회문제의 원인을 경제에서 찾았던 응오 티 념 등 새로운 지식인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베트남 시내 꽝쭝 박물관에 있는 응오 티 념의 동상. 출처 위키피디아
유·불·도 3교의 영향 아래에서 같은 연원을 지닌 개념들을 쓰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상의 흐름과 비교하거나 대조해서 살펴볼 대목들이 많아 보인다. 책에서 지적하듯, 베트남 사상가들이 대체로 “인간들에게 세계관과 마음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내용을 전달하려는 것보다는 인간의 도덕 교육에 더 심혈을 기울이는” 경향을 보이는 대목도 흥미롭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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