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남북 판문점선언과 북미 싱가포르선언은 이른바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었다. ‘냉전 체제의 종식’에 따른 남북한의 ‘평화공존’이 그 주된 방향점으로 이야기되는데, 여기서 ‘평화공존’은 꼭 ‘통일’을 전제로 삼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지난해 출범한 재단법인 ‘한반도평화만들기’(이사장 홍석현)가 첫 학술행사의 표어를 ‘한반도 패러다임의 대전환-통일에서 평화로’로 정한 데에서 보듯, ‘통일에서 평화로’는 한반도 문제에 대한 현재 한국사회의 주류 담론이라 할 만하다.
오랫동안 ‘분단체제론’을 제기해온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사진)는 최근 계간 <창작과비평>(181호)에 게재한 글에서 ‘통일에서 평화로’ 담론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어떤 남북연합을 만들 것인가’ 제목의 글에서 ‘통일에서 평화로’ 담론이 “비핵화는 미국의 압박과 협상에 맡기고, 정치는 정당과 정치인에게 맡기며, 장래의 남북관계는 외교부에 맡긴 채 시민들은 좀 가만 있으라고 달래는 기능을 수행하는 논리가 아닌지 성찰해볼 문제”라고 지적했다.
기본적으로 백 교수는 남북연합 건설이 북의 비핵화와 개혁·개방, 남한 사회의 변화 등과 두루 연관된, “한반도의 당면 목표”라고 주장한다. 북의 ‘완전한 비핵화’ 이행과 북에 대한 ‘안전 담보’ 제공을 맞바꾸는 것이 싱가포르선언의 핵심인데, 여기서 여러 요인들이 불안하게 얽힌 ‘안전 담보’는 “끊임없는 줄다리기의 대상이고 검증이 필요한 작업”이다. 때문에 공동으로 현실을 관리할 남북연합의 건설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흔히 개혁·개방 등으로 표현하는 북한의 변화에 대해서도, “북은 박정희식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우리식’을 창안해야 할 처지이며 여기에는 남북연합 또는 그에 준하는 정치적 장치가 수반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시민참여를 바탕으로 삼아야 할 한국사회의 변화 역시 “점진적이고 단계적이며 창의적인 통일과정이라는 한반도체제의 변혁과 이에 수반되는 획기적인 시민참여를 외면해서는 해결은커녕 완화도 힘들다”고 지적한다.
백 교수가 문제로 삼는 것은, ‘통일에서 평화로’라는 슬로건이 내포한 ‘평화공존 속 보통국가’라는 목표다. ‘남북이 항구적 분단에 동의한 두 개의 보통국가로 공존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는데, 이는 북한이 감내해야 할 자본주의 세계체제 내에서의 숨막히는 경쟁을 방치하고 환경 문제와 성차별 문제 등 남한사회의 여러 개혁 과제들을 미봉하는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는 “남북관계는 그나마 한고비 넘었으니 북한과 미국에 ‘아웃소싱’하고 우리 내부의 개혁 과제들을 돌볼 차례라는 식으로는 남한사회의 개혁조차 제때 갈피를 잡기 어려운 것이 분단체제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이소성대’(以小成大·작은 것부터 시작해 큰 일을 해냄)는 필요하나 “원(願·바람)은 크게 세우고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백 교수의 주장이다. ‘분단한국의 특수성’은 곧 현존 세계체제의 모순이 집약된 현장이자 ‘약한 고리’에 해당하기 때문에, 촛불혁명과 이에 힘입은 최근 한반도 대화 역시 이 거대한 과정의 일부로 인식하자는 것이다. 그 중요한 과정으로서 “남북연합의 건설은 2007년 10·4정상선언으로 이미 시작되었고, 10년 가까운 중단과 역행 끝에 2018년 판문점선언으로 화려하게 재개된 것”이라고도 짚는다.
최원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