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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기계에 대항하는 인간의 번역이란

등록 2018-08-23 19:55수정 2018-08-23 20:47

번역가 조영학·노승영·박산호
소소한 버릇, 도구 집착부터
좋은 번역에 대한 성찰까지
번역가의 삶에 대한 솔직한 고백
여백을 번역하라
조영학 지음/메디치·1만5000원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
노승영·박산호 지음/세종서적·1만4000원

막이 내리고 관객들의 박수가 터져 나온다. 출연자를 지나 무대 뒤에서 공연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뛴 사람들이 무대 위로 불려나올 때, 관객들의 박수 소리는 한층 커진다. 저자의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번역가가 한 발 앞으로 나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할 때,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는 것도 같은 마음이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공연이나 책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지는 그런 마음 말이다.

번역가 세 명이 책을 냈다. 번역 17년 차 중견 장르소설 번역가 조영학이 <여백을 번역하라>를, 10년 넘게 인문·사회·과학 번역을 해온 노승영과 장르소설 번역에 주력해온 박산호는 공저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을 썼다. 좋은 번역이란 무엇인지부터 번역가의 고달픈 일상까지 색깔은 다르지만 이야기들이 책을 넘어 이어지고 포개지는 모습이 흥미롭다.

7년 넘게 번역 강의를 해온 조영학 번역가가 번역을 하겠다는 학생들에게 하는 말은 이렇다. “하늘이 점지해준 천직이 아니라면 이쪽으로는 오줌 눌 생각도 하지 마라.” 번역을 하며 한 달에 400만원을 벌려면, 매달 원고지 1천매를 번역하면서 동시에 검토와 독서, 교정까지 병행해야 하는 중노동을 감내해야 한다. 번역가의 수입을 결정하는 것은 (표면적으론) 번역의 질이 아닌 양이다. 번역이 좋다고 출판사에서 (당장은) 돈을 더 주진 않기 때문이다. 보통 한 권을 2~3달 안에 끝내야 하는데, ‘완벽한’ 번역을 하겠다고 자료와 교정지를 붙들고 늘어진다면 그 전문번역가는 1년도 안 돼 굶어 죽을 것이다. 절대적 시간 부족을 고려하지 않고 몇몇 사소한 오역을 들어 번역가의 생계를 끊을 작정으로 달려드는 비평가들이 못내 야속한 이유다.

그가 주로 술술 읽히는 장르소설을 번역하는 사람이긴 하나, 그의 번역론은 얕지 않다. 그는 직역과 의역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은 구도부터 잘못됐다고 본다. 기호만 번역 대상으로 보고 문법·목소리·언어습관·시대상 등 ‘여백’은 무시한 채로 생기 없는 번역을 만들어놓고는 이를 ‘직역’이라고 미화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번역은 마치 고래를 저수지에 옮겨놓아 죽게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는데 말이다.

그의 ‘여백 번역론’은 곧 ‘다시 쓰기’다. 즉, 번역이란 ‘외국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이 아니라 ‘외국어로 표현한 상황을 우리말로 다시 쓰는 과정’이란 말이다. 그가 지향하는 번역은 “최대한 우리말 체계와 언어습관에 가까운 번역”이다. “번역은 작가가 아니라 독자를 지향한다. 독자의 언어로 번역하라.” 예를 들어, “To understand is to forgive”를 기호만 우리말로 옮기면 “이해하는 것이 용서하는 것이다”라는 번역 투의 죽은 문장이 나온다. 이 문장을 “이해해야 용서도 한다”라고 번역하거나, 한 발 더 나가 “이해 없이 용서도 없다”로 입말처럼 자연스럽게 옮겨야 비로소 좋은 번역이 된다. “번역은 단순히 기호를 물리적으로 옮겨 적는 과정이 아니라 기호와 기호를 둘러싼 온갖 의미체계를 화학적으로 결합해 우리말이라는 전혀 이질적인 결과물을 도출해내는 과정이다.”

노승영이 번역 강의를 할 때마다 “번역은 복원”이라고 말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번역은 텍스트에서 출발하지만 텍스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야 한다. 말하자면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상태, 인물과 사건과 배경이 존재할 뿐인 무정형의 상태에 언어의 옷을 입히는 작업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작가를 일종의 번역가로 볼 수도 있고 번역가를 일종의 작가로 볼 수도 있다.”

노승영이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버러 스미스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스미스의 번역을 “내용을 크게 누락하지 않으면서도 원문에 종속되지 않는 점이 인상적”이라고 칭찬한다. “아직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어떤 플롯을 한강은 한국어로 번역했고 스미스는 영어로 번역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어느 시점부터 작가와 번역가는 대등한 존재가 된다.”

번역이란 이렇게 고도의 지적 작업이기 때문에 조 번역가는 인공지능 번역에 대한 작금의 우려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설령 인공지능(AI)이 95% 가까이 완성도를 보인다 해도, 나머지 5%를 채우려면 어차피 번역가 수준의 인력이 번역 과정에 맞먹는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 번역은 고도의 지성과 기술이 필요한 직업이다. 단어 하나하나, 표현 하나하나를 선택할 때마다 판단과 선택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수차례 교정 작업을 거친다. 그런데 가치판단 능력조차 없는 기계가 이진법 알고리즘으로 ‘단순선택’한 언어들을 무조건 믿겠다고? 단지 돈과 시간이 적게 들어간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기에 번역가들은 기호에 갇히지 않는 번역, 더욱 ‘인간적’인 번역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박산호 번역가가 써놓은 다짐의 문장은 앞의 모든 말들을 요약한다. “기계가 따라올 수 없는 번역이란 아마도(?) 기계는 가질 수 없는 풍요로운 정서와 상상력을 갖춘 번역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더욱더 인간다워지기로 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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