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블록은 죄가 없다>의 저자 박대근 박사가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에서 보도포장용 투수블록이 물을 흡수하는 모습을 시연해 보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한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다. 2300여년 전 군대와 물자의 이동을 위해 착공된 석재 포장도로인 아피아 가도(Via Appia)는 그 원조다. 총연장 560㎞란 규모뿐 아니라 로마 제국의 뛰어난 토목기술을 입증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맨 밑바닥에 자갈층을 깔고(배수), 그 위에 흙과 자갈을 섞어 덮고(다지기), 그 위에 잘게 부순 돌과 모래를 완만한 아치형으로 채운 뒤(빗물 고임 방지), 맨 위에 평평한 마름돌을 촘촘히 얹었다. 차도의 양 옆엔 흙을 다진 인도를 따로 만들었다. 기원전 71년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이끈 항쟁에서 로마군에 패한 노예 6000여명이 길 양쪽으로 끝도 없이 십자가에 매달렸던 역사도 전한다.
예부터 도로 개설과 포장은 국력과 문명의 표징이었다. 16세기 유럽에선 마차 교통의 발달로 도로 개량에 속도가 붙었다. 19세기 이후 자동차 보급이 확산되면서 도시에서도 차도와 보도의 구분이 엄격해졌다. 신속한 이동이 중시됐던 ‘개발’시대를 지나 오늘날엔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슬로 시티 개념이 등장하고 ‘차보다 사람 먼저’가 강조된다. 보행자 전용도로(보도)는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고 있는 걸까? 적어도 한국에선 관심과 기술력 등 여러 면에서 차도보다 한참 후순위다. 해마다 연말이 가까워지면 여기저기를 파헤치는 보도블록 교체공사는 ‘부실시공, 예산낭비’의 대명사가 됐다. 그러나 정작 보도블록에 대해 궁금해 하거나 관심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도로 포장 전문가인 박대근 서울기술연구원 부연구위원이 쓴 <보도블록은 죄가 없다>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보도블록에 관한 모든 것을 알려주는 실무지침서이자, 정책 제언이며, 길의 철학을 담은 에세이다.
15일 <한겨레>와 만난 박 연구위원은 국내 처음으로 보도블록에 관한 대중서를 낸 것에 대해 “새로운 분야에 대한 탐구욕이 강한 편이에요”라며 웃었다. “한국도로협회 연구원으로 있다가 2008년 서울시의 전문직 공채로 들어와 올해 봄까지 꼬박 10년간 공무원 생활을 했습니다. 차도 포장 전문가로 채용됐는데, 마침 서울시가 보도 포장을 본격 정비하면서 이전까지 전혀 관심이 없었던 보도블록 관련 업무를 맡게 됐어요. 외국 사례 견학도 다니며 공부를 했는데, 하면 할수록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이 없다는 매력이 있더라구요.” 그는 내친 김에 2014년엔 도로 포장을 주제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8년 서울 정동 덕수궁 돌담길은 보행자 길과 차도를 엄격히 나누지 않는 ‘공존도로’ 개념을 도입하고 차도를 사괴석으로 포장해, 걷고 싶은 거리, 아름다운 길의 첫 순위로 꼽혔다.(위) 픽셀하우스 제공
그러나 2013년 서울시는 잦은 파손 등을 이유로 차도를 아스팔트 포장으로 교체해 논란이 일었다. 픽셀하우스 제공
보도블록 포장의 부실시공은 블록 파손으로 비용을 낭비하고 도시 미관을 해치는 것을 넘어 보행자들의 안전을 위협한다. 픽셀하우스 제공
그는 보도블록 교체공사가 잦은 이유가 반드시 불량자재나 부실시공 탓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상하수도관 보수·신설, 신규건축물 인입관로 공사, 도시가스관·공중선·통신선로의 지중매설 등 일상생활과 밀접한 공사들은 보도블록 제거 및 재포장이 필수라는 것. 블록 포장은 아스팔트 포장보다 시공이 까다롭고 비용이 비싸며, 쉽게 파손돼 수명도 짧다. 반면, 일부 구간만 단기간 시공이 가능해 보행자 불편을 최소화하며, 다양한 패턴과 색상으로 주변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도시 미관을 연출한다. 아스팔트와 달리 물을 땅 속으로 투과시킬 수 있는 투수성은 안전과 쾌적함을 보장하는 결정적 장점이다. 보도 포장을 아스팔트가 아닌 블록으로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왜 보도블록은 대중의 관심 바깥에 있거나 저평가되는 걸까? “건축물, 교량, 댐 등 3차원 공간에 중력을 거스르며 우뚝 선 구조물들은 그 기술과 아름다움이 쉽게 드러난다.” 반면 보도블록은 완성된 표면밖에 볼 수 없는데다 하찮고 단순한 일 같아 보인다.
국내에서 보도블록이 처음 조명을 받은 건 88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시가 보행환경 개선에 나서면서다.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이 보도정비 사업은 그러나 “공학적 접근은 뒷전이고 (…) 심사위원들이 잘 생기고 예쁜 보도블록을 고르는 데만 집중하는 ‘미인계’에 홀딱 넘어가”고 말았다. 2008년 서울시가 추진한 ‘서울거리 르네상스’ 정책에는 처음으로 보도블록에도 ‘정밀 시공’이란 단어가 등장했다. 당시 시중엔 ‘서울시장의 사모님 하이힐이 보도블록 틈새에 끼여 시작된 정책’이라는 우스개가 돌았다. 하이힐 덕분에 보도블록이 마침내 겉포장이 아닌 진짜 포장으로 거듭난 셈이랄까.
맨홀 덮개의 동그란 형태에 맞춰 정교하게 시공된데다 주변 블록과 일치하도록 조화된 보도블록 포장. 픽셀하우스 제공
영국 런던의 자연사 박물관 앞에 있는 공존도로는 인도와 차도의 분리가 안전하다는 고정관념을 벗어난 실험적인 도로 개선책으로 주목받는다. 픽셀하우스 제공
프랑스 파리의 상젤리제 거리의 돌 포장은 아크(Arc) 패턴으로 수려함을 뽐낸다. 픽셀하우스 제공
독일의 한 고속도로 휴게소의 주차장 블록 포장은 버스와 트럭 등 대형차량들의 하중을 견디도록 견고하게 시공됐다. 픽셀하우스 제공
지은이는 “보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게 선진국의 특징”이라며 “우리나라도 차량 위주에서 사람 위주로 관심이 옮겨지고 있는데 방향은 맞게 잡은 것”이라고 말했다. 책에는 열섬효과를 낮추는 차열블록, 빗길 안전을 위한 투수블록, 인도와 차도의 구별을 없앤 공존도로의 모범 사례인 영국 런던 박물관도로와 아스팔트 차도로 복귀하고 만 서울 정동 돌담길의 비교, 지은이가 차도블록 포장의 실패 사례로 지적한 서울 광화문 세종대로, 박원순 서울시장이 도입한 공사 현장 보행안전 도우미 등 사람과 길에 대한 신세계가 풍부한 사진들과 함께 흥미롭게 펼쳐진다.
표면이 울퉁불퉁한 점자블록은 시각장애인에게 매우 유용한 길잡이다. 하지만 사람의 진행 방향으로 4개의 줄이 돌출된 노란색 유도블록은 비나 눈이 오는 날엔 마치 스케이트 날과 같은 역할을 해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도 있다. 또 표면에 바둑알들이 놓인 것 같은 점자블록은 방향 전환이나 전방의 위험을 알려주는 ‘눈’ 구실을 하지만, 유모차를 끌고 다니기 불편하다는 민원도 끊이지 않는단다. 지은이는 “약간의 불편함은 다양한 시민들의 공존을 위해 이해와 수용이 가능하지만, 반드시 있어야 할 게 없어지면 누군가는 삶의 일부를 포기하게 된다”고 말한다.
서울-양양 고속도로의 한 휴게소 주차장의 블록포장이 부실 시공으로 파손된 모습. 픽셀하우스 제공
지은이가 공무원 시절에 목격한 보도블록 공사 실태는 우리나라 건설산업의 적폐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입찰 담합과 돌려먹기, 원청-하청-재하청까지 줄줄이 이름만 빌려주고 커미션 챙기기, 부실한 현장 감리가 얽히고설킨 거대한 카르텔이었다. 그는 “시공 첫 2년과 감사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하자 담보 책임 기간인 2년 안에 파손이 생기면 제조사, 시공사, 감독 중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같은 공무원의 잘못은 눈감아주고 (감사·점검 실적을 채우려) 산하기관은 상대적으로 고강도 감사를 하는 제식구 감싸기 식의 조사를 한 건 아닌지 공무원들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 에필로그의 한 구절에 뜨끔할 공무원들이 많을 것 같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