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일인의 삶
브룬힐데 폼젤 지음·토레 D. 한젠 엮음/박종대 옮김/열린책들·1만5000원
정치적 무관심이 그렇게 잘못된 걸까. 세상일 중요한 줄 알지만 때로 나 하나 건사하기도 피로한, 그래도 저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기엔 좀 멋쩍은, 보통의 우리에게 <어느 독일인의 삶>은 드물게 우아한 대답이다.
형식이 그러하다. 이 책은 독자를, 전문가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청중으로 대하지 않는다. 역사의 무대로 끌어올려, 직접 대면하게 한다. 나치 독일에서 사회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 수동적 태도로 일관했던 100살 넘은 ‘증인’의 목소리를 바로 듣게 한다. 생생한 대면의 경험은 중요하다. 그 인상과 교훈 따위가 재조직되어 바로 나만의 직관이 되기 때문이다.
육성의 주인공은 나치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개인비서 겸 속기사로 일한 브룬힐데 폼젤. 다큐멘터리 영화 <어느 독일인의 삶>(A German Life, 2016)의 감독 크리스티앙 크로네는 2013년 당시 102살이던 폼젤의 회고와 자기주장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 내용을 토대로 쓰인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이야기를 연대순으로 정리한 것이 하나, 언론인이자 정치학·사회학 연구자인 토레 D. 한젠이 오늘날 이 구술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분석한 게 또 하나다.
나치 선전부 장관 괴벨스의 충실한 비서였던 폼젤은 숨을 거둘 때까지 나치 범죄에 대한 자신의 책임은 없다고 주장했다. “완벽한 흑과 백은 없어요. 항상 어느 정도씩 회색이 들어 있죠.” 정치엔 관심 없었다는 그녀는 정의와 악을 구분하기 모호하다고 했다. 무관심은 초월일까. 디엠지국제다큐영화제 제공
폼젤은 지난해 사망했다. 사는 동안 106년이란 긴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반성은 하지 않았다. 그녀의 주장에는 일관적인 특징이 있다. 첫째, 나치 범죄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두의 책임으로 일반화하는 것이다. “막상 그 시대에 살았다면 우리와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다들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어요. 유대인 탄압도 그중 하나였지만, 그 밖에 다른 일도 많았어요.” “난 잘못한 게 없어요. 져야 할 책임도 없죠. 독일 민족 전체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그건 어쩔 수 없지만.” 둘째, 정치적 무관심을 무책임한 개인의 면죄부로 삼는다. “제1차 세계 대전에 패배한 뒤 실업자와 거지, 가난한 사람들이 넘쳐났어요. 그런 모습을 보려 하지 않았어요. 외면해버렸죠.”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저 시대에 끌려갔을 뿐이에요! 의지와는 무관하게.”
소련군이 나치 독일의 심장부 베를린으로 입성한 1945년 4월30일, 괴벨스(왼쪽 두번째) 등 핵심 지휘부가 자살한 히틀러의 주검을 불태우며 나치식 경례를 하고 있다. 영화 <몰락>(2004)의 한 장면. 피터팬픽쳐스 제공
한젠은 이 나치 가담자의 특성을 살펴보면서 우리 시대에 보내는 경고를 읽어낸다. 역사상 최악의 범죄 중 하나가 저질러지는 동안에도 개인의 물질적 안정과 출세가 먼저인, 정치와 사회엔 무심한 ‘폼젤들’이 상당수였던 1930년대와 오늘날의 공통점을 추려가면서. “우리는 어느 정도씩 다들 폼젤인 것은 아닐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드러난다. 공감능력과 연대감의 상실을 수반하는 광범한 시민 계층의 정치적 무관심(무지)이 나치의 비상과 성공을 부른 한 원인이었다는 점이다. 비록 자신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여기까지는 재확인이고, 지금은 30년대가 아니다. 정보격차 논란을 이 자리에선 잠시 접어둔다면, 이어지는 지적은 출구 없는 책임감을 동반한다. “인터넷을 통해 정보가 넘치고 대중매체가 발달한 시대에는 원칙적으로 그런 무지가 별로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소련군이 나치 독일 제3국의 심장부 베를린으로 입성한 1945년 4월30일, 괴벨스가 히틀러의 지하벙커에서 가족들과 집단 자살을 하기 앞서 마지막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영화 <몰락>(2004)의 한 장면. 피터팬픽쳐스 제공
이 책의 가치는 “수많은 피로써 일궈낸 민주주의의 성취들이 다시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의 중요성”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한젠은 1930년대와 마찬가지로 현재 서구 국가들의 결속은 경제위기로 와해되고, 도널드 트럼프로 대표되는 우익 포퓰리스트들은 국민의 분노와 절망을 이용하면서 민주주의를 퇴화시킨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고 연대의 힘으로 그것을 지켜내려는 부단한 시도”인데, 우익 포퓰리즘의 권력은 개인의 권리부터 박탈해버린다는 것이다. 히틀러가 그랬듯 ‘독재자’는 안정을 약속하지만 독재 아래 개인의 삶은 가장 불안정하다.
지금 한국에서 이 책이 읽혀야 하는 이유도 있다. 촛불은 부정의와 반민주에 대한 무관심이 결코 초월이 아님을 증명하며 민주주의의 진면목을 보여줬다지만, 기무사 ‘촛불 계엄’ 문건은 우리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지난해 도모된 계엄이 1년도 넘게 지나서야 알려졌다. 독재의 위협을 극복했다는 믿음에 착각이 섞여 있었음을 이제야 안 것이다. 이 사건은 질문이 되었다. 다시, 왜 ‘더 나은’ 민주주의인가. 그 이유가 이미 충분한 사람은 이렇게 묻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더 필요한 우리에게, 이 책은 혼란스런 정치·사회적 자극에 반응하는 하나의 직관이 되어줄 것이다.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