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오후 서울 성수동 공원에 설치된 온도계가 41도를 기록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폭염 사회
-폭염은 사회를 어떻게 바꿨나
에릭 클라이넨버그 지음, 홍경탁 옮김/글항아리·2만2000원
1995년 7월 미국 시카고는 말 그대로 ‘살인적인 날씨’ 때문에 참사를 겪었다. 시카고 역사상 가장 더운 날이었던 이달 14일에는 기온이 섭씨 41도까지 치솟았고, 폭염은 일주일 내내 이어졌다. 사람들은 병에 걸리기 시작했다. 이달 13~19일 사이 구급차 요청은 수천 건에 달해 구급차를 제때 보내지 못하는 일이 속출했고, 병원 응급실에는 자리가 모자랐다. 끝내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달 12일, 13일에는 각각 74명과 82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 수치는 7월 평균 일일 사망자 수인 72명보다 약간 높은 정도였다. 그러나 14일부터 사망자 수는 날마다 188명, 365명, 241명, 193명, 105명으로 급격히 늘었다. 쿡 카운티 검시소의 시체안치소에는 빈자리가 없어 냉동트럭들에 시체를 보관해야 했다. 뒷날 7월14~20일 사이 시카고의 ‘초과 사망’ 수치는 평균보다 739명이나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폭염 때문에 7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는 참사가 난 것이다.
리처드 데일리 당시 시카고 시장을 비롯한 정치가들은 이 사건을 그저 몇 가지 요소가 드물게 결합해 발생한 ‘기상학적 사건’으로 보고 싶어했다. 사망자가 급증하던 때에는 ‘과연 폭염 때문에 죽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참사가 지나간 뒤 관료와 언론은 ‘누구의 잘못인가’ 묻기 바빴다. 허리케인이나 지진, 홍수처럼 ‘장대한 볼거리’가 없었던 이 폭염 참사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점차 잊혀져갔다.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다른 극단적인 기상이변의 사망자 수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데도 불구하고!
<폭염 사회>는 미국의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 뉴욕대 교수가 2002년에 펴낸 책이다. 시카고 참사에 대한 ‘사회적 부검’(social autopsy)이라는 원제에서 알 수 있듯, 지은이는 시카고 폭염 참사에서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가른 ‘사회적 요인’들이 무엇이었는지 밝히기 위해 사태로 파고들었다. “폭염이 대중적인 관심을 거의 받지 못하는 이유는 막대한 재산 피해를 내지 않거나 다른 기상 재난처럼 엄청난 볼거리를 제공하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폭염의 희생자들이 노인, 빈곤층, 고립된 이 등 대개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쿡 카운티 시체안치소 구석에 보관된, 시카고 경찰이 급하게 휘갈겨놓은 노트로부터 폭염 희생자들이 죽어간 환경이 어떤 것이었는지 추적해나간다.
1995년 미국 시카고에서 일어난 폭염 참사와 관련, 당시 집계된 사망자 수(위쪽)와 신문 머리기사에 보도된 사망자 수의 변화(아래쪽). 글항아리 제공
1995년 시카고 폭염 당시 경찰이 사우스사이드 지역의 한 아파트에서 폭염으로 사망한 주검을 옮기고 있다. 출처 <시카고 선타임스>, 사진 브라이언 잭슨. ⓒ 2002 글항아리 제공
1995년 시카고 폭염 당시 쿡 카운티 시체안치소에서 지친 노동자 한 명이 주검을 운반하고 난 뒤 쉬고 있다. 출처 <시카고 선타임스>, 사진 라치 하인. ⓒ 2002 글항아리 제공
무엇보다 지은이가 주목한 것은 ‘고립’이다. “수백명이 잠긴 문과 닫힌 창문 너머 남들이 잘 찾지 않는 후덥지근하고 통풍이 안 되는 사적인 공간에 갇혀 홀로 숨을 거두었다.” 이들은 대체로 1인 가구, 노인, 빈곤층 등 사회에서 고립된 ‘취약계층’이었다. 원룸(SRO)에서 홀로 죽은 노인, 남성 사망자 비율이 특히 높았다. 죽은 뒤 상당 시간 동안 발견되지 않았던 사망자도, 시체안치소에 시체와 유품을 거두러 오는 이가 아무도 없었던 사망자도 많았다. “은둔”, “혼자”, “친척을 찾지 못함”, “문이 잠겨 있었음”, “공기 순환이 되고 있지 않았음”, “응답이 없음” 등 경찰 보고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말들이 이를 보여준다. 이들이 대체로 빈곤 지역 속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살아왔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여기에는 더 깊이 따져봐야 할 사회적 요인들이 다양하게 잠복해 있다. 홀로 사는 노인들이 많더라도, 이들이 서로 어울리고 교류하는 환경이 갖춰진 경우에는 사망률이 그리 높지 않았다. 예컨대 연방 정부의 지원을 받는 비영리 원룸 ‘레이크프런트’ 주민들에게는 “그들이 안전한지 확인하며 냉방장치가 있는 휴게실로 내려오라고 권한 관리인과 사회복지사뿐 아니라 음식과 시원한 음료를 가져다준 경찰, 소방대원을 비롯해 적십자 같은 지역 사회복지기관에서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관계를 기대할 수 없는 대다수 상업적 원룸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폭염 속에서 홀로 죽어갔다. 낙후된 기반시설, 높은 범죄율, 사라진 공공장소 등의 환경이 주민들로 하여금 집 밖으로 나오길 꺼리게 만든 것이다.
독거노인의 수와 빈곤층 수 등 인구통계학적 요소가 거의 동일했던 두 지역인 노스론데일과 사우스론데일(리틀빌리지)의 비교 연구는 이런 맥락을 잘 보여준다. 두 지역 모두 1950년대 이후 공업이 쇠퇴하면서 기존 인구가 빠져나갔는데, 새로운 토박이가 유입되지 않은 노스론데일에서는 지역 환경이 크게 악화하고 범죄율이 치솟은 반면, 라틴계 주민들이 주로 정착한 사우스론데일에서는 비교적 안정적인 지역 사회가 구축됐다. 이 차이는 폭염 기간 동안 사망자 수의 차이(노스론데일 19명, 사우스론데일 3명)로 드러났다.
1995년 시카고 폭염 당시 장례 노동자들이 폭염으로 사망한 무연고 희생자들의 주검을 시 외곽 공동묘지에 매장하고 있다. 출처 로이터/게티포토, 사진 스콧 올슨. 글항아리 제공
지은이가 분석하는 ‘사회적 요인’은 이뿐만이 아니다. 90년대 시카고가 추구한 ‘기업가적’ 정부 모델은 집에서만 생활하는 노인들을 공식적인 지원 네트워크의 주변부로 밀어냈다. 경찰의 규모는 커졌지만 노인을 돌보는 서비스는 갈수록 축소됐다. 연방 정부가 재정을 대는 ‘저소득 가정 에너지지원 프로그램’은 1985년 그 규모가 가장 커졌으나,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폭염 참사가 일어나던 그 해에까지 삭감되는 일을 겪었다. 홍보 캠페인에만 매달린 정부의 안일한 대처는 참사의 사회적·정치적 본질을 보지 못하게 막았고, ‘스펙터클’한 볼거리만을 찾아다닌 언론의 보도는 도대체 무엇이 중요한지 잊게 만들었다.
책 전체에 걸쳐 ‘사회적 부검’을 통해 지은이가 꼼꼼히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그 스스로 말하듯 마르셀 모스가 제시한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이란 개념에 해당한다. 폭염은 인간 사회의 ‘외부’에 있는 자연으로부터 마치 불가항력처럼 찾아왔지만, 실제로 폭염을 참사로 만든 것은 하나의 전체로서 조직되어 작동하고 있는 인간 사회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기후 같은 극단적인 외부의 힘이 그토록 파괴적인 이유는 부분적으로 새롭게 나타난 고립과 민영화, 극단적인 사회적·경제적 불평등, 현대 도시 여기저기에 퍼져 있는 부와 가난이 집중된 구역 등이 취약한 주민에게 사계절 내내 위험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참사가 일어나기 전까지, 이 같은 ‘일상의 위기’를 제대로 의식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도시와 사회 환경이 이렇게 전형적인 모습으로 계속되는 한, 참사는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