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박현주의 장르문학 읽기
이마무라 마사히로 지음, 김은모 옮김/엘릭시르(2017) 모두가 영리한 현대에서 추리 작가는 힘들다. 정교한 트릭으로 미스터리를 짜는 본격 추리 작가라면 더 그렇다. 웬만한 속임수는 이미 널리 알려졌다. 빅 브러더가 지배하는 시시티브이(CCTV)의 시대, 남의 눈에 뜨이지 않고 움직이기도 어렵고, 휴대 통신 기기의 발달로 갑자기 연락이 끊기는 일도 드물다. 여기서 어떻게 새로운 트릭을 만든단 말인가? <시인장의 살인>은 일견 또 하나의 ‘흔한 눈 속의 산장’ 미스터리처럼 보인다. 눈이 내려서 아무도 오고 갈 수 없는 상황,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 바로 우리 안에 범인이 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산장이 고립된 이유는 눈이 아니다. 바로 제목에 나타난 것처럼, 시인(屍人)이다. 즉, 우글우글 몰려든 시체 인간들. 소설에서 존 왓슨처럼 화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하무라 유즈루, 신코 대학교 미스터리 애호회의 회원이다. 미스터리 애호회는 회원이 단 두 명뿐인 단출한 동아리로, 하무라는 ‘신코의 홈스’라고 불리는 아케치 교스케의 조수로 활동한다. 바야흐로 미스터리의 계절 여름, 두 사람은 천재 소녀 탐정이라는 명성을 얻고 있는 겐자키 히루코의 도움을 받아 영화 연구부의 촬영 합숙에 참여하게 된다. 그들이 다다른 곳은 자담장이라는 산속 펜션이다. 지난해에 해결되지 못한 수상한 사건, 이름 모를 사람에게서 온 협박장으로 가뜩이나 불길한 기운을 드리운 합숙이었는데, 설상가상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테러가 일어나 학생들은 고립되고 만다. 곧이어 바깥의 접근이 차단된 이 산장에서 사람이 한 명씩 죽어간다. 작가의 데뷔작인 <시인장의 살인>은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일본의 주요 미스터리 대상을 다 차지한 소설이다. 그리고 그 이력이 무색하지 않은 작품이다. 먼저, 공포 소설의 설정을 도입하여 기묘한 배경을 세운다. 그리고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는 환경에서 무리 중에 범인이 있는 ‘클로즈드 서클’ 수수께끼를 충실히 재현한다. 시체 인간의 등장은 사건의 배경이기도 하지만, 해결의 중요한 실마리도 된다. 소심하고 양심적이지만 자기도 모르는 직관이 있는 하무라, 우연히 자꾸 살인 사건을 만나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탐정이 된 히루코. 두 사람의 관계도 전형적이면서도 대강은 귀엽다. 무엇보다 <시인장의 살인>은 장르 소설을 읽는 재미를 다시 일깨워주는 작품이다. 이 소설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트릭을 풀어가는 지적 즐거움이 있고, 초자연적인 존재가 주는 공포가 자아낸 흥분이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억지 없이 잘 맞아떨어진다. 또한 홈스와 왓슨이라는 뻔한 구도를 이용하여 고전 추리소설 독자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앞으로 나올 시리즈가 있을지 기대감도 불러일으킨다. 사람의 취향에 따라서 좋고 나쁨을 말할 수는 있어도 오락 소설의 장점을 골고루 갖춘 똑똑한 수작이다. 많은 경우 장르 소설이 재미있다는 말은 적당하게 인색한 칭찬처럼 여겨진다. 재미는 객관화할 수 없고 주관적인 영역에 있으며, 의미 없이는 필요 없다는 것처럼. 이 명제는 대체로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장의 살인>은 내게는 정말 재미있었고, 별다른 의미를 발굴하지 않고도 그 자체로도 충분한 소설이었다. 가끔은 순전한 재미라는 감정이 무척 소중하다. 박현주 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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