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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하루키 “소설을 쓰는 동안은 생각하지 않는다”

등록 2018-08-03 09:37수정 2018-08-03 09:52

하루키 인터뷰집 ‘수리부엉이는…’ 출간
리얼리즘 문장에 비리얼리즘 이야기
여성 캐릭터 도구화 질문엔 ‘급 사과’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제공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제공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무라카미 하루키·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홍은주 옮김/문학동네·1만4000원

무라카미 하루키는 미디어와 친한 작가가 아니다. 신문·잡지와 인터뷰하는 일도 드물고, 문학 전문지에도 자주 얼굴을 비치지 않는다. 문학 행사 같은 데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는다. 일각에서 신비주의 마케팅 혐의를 둘 정도다. 단행본 한 권 분량으로 나온 그의 인터뷰집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가 반가운 이유다.

2015년 7월과 2017년 1~2월 후배 작가 가와카미 미에코와 한 네 차례 긴 인터뷰를 모은 이 책에서 하루키는 소설에 대한 생각, 글을 쓰는 습관과 리듬, 자기 소설의 탄생 뒷이야기, 문학상과 일본 사회에 대한 견해 등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인터뷰가 하루키의 두 책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와 <기사단장 죽이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질문과 대답이 이 책들에만 갇히지 않고 확장·심화되어 ‘하루키 월드’로 들어가는 안내자 구실을 톡톡히 한다.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나서, 생각지 못한 사람이,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죽는다. 제가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것 같아요.”

의외성과 우연성, 비개연성을 하루키는 추구한다. 그럼에도 그의 소설은 있음 직한 이야기처럼 잘 읽힌다. 까다롭지 않으며 유려한 문장에 비결이 있다. 하루키 자신은 “제 문장은 기본적으로 리얼리즘”이지만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비(非)리얼리즘”이라고 정리한다. 인터뷰어 가와카미가 말하는 “벽 뚫고 나가기”, 또는 그에 호응해 하루키가 한 말 “벽을 뚫고 나간다는 건 다른 세계로 가버리는 일”이 하루키식 비리얼리즘의 요체다.

가와카미의 ‘벽 뚫고 나가기’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하루키는 ‘담갔다 건진다’는 표현을 쓴다. ‘자아 의식’ 또는 ‘지상의식 레벨’에 머무르지 않고 재료로 하여금 무의식층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오도록 한다는 뜻. 그렇게 해야 깊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가와카미는 하루키식 이야기 만들기의 핵심으로 ‘이화’(異化)를 들며, 더 나아가 지하 2층의 비유를 동원한다. 가족과 사회의 공간인 1층, 좀 더 개인적인 방인 2층에 대비되어 지하 1층이 사소설 또는 근대적 자아의 방이라면, 그 아래 ‘무의식’의 몫이라 할 지하 2층이 곧 하루키 소설의 공간이라는 것.

하루키는 자신이 처음부터 플롯을 정해놓고 소설을 쓰지 않으며 단어가 이끄는 대로, 스토리의 흐름에 따라 써 나간다고 말한다. <기사단장 죽이기>의 경우에도 어느 날 문득, 갑자기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말이 떠올랐고 그 제목으로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게다가 이 소설 도입부는 그 전에 아무런 목적 없이 써두었던 문장들이라는 것. 두 권짜리인 이 소설의 1·2권 부제로 쓴 ‘이데아’와 ‘메타포’ 역시 플라톤 철학이나 수사학의 엄밀한 개념과는 상관 없이 “그냥” “어감이 좋아서” 빌려온 것일 뿐이라고 그는 천연덕스럽게 털어놓는다.

“집필중에는 이야기의 흐름 자체에 정신이 쏠려 있고,” “스스로에게 생각할 여유를 별로 주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하는데, 이 말에서는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는 라캉의 유명한 명제가 떠오른다. 말하자면 하루키 소설의 공간인 지하 2층이란 곧 라캉의 무의식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후배 작가 가와카미 미에코와 네 차례에 걸쳐 한 인터뷰를 모은 책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가 번역 출간되었다. 문학동네 제공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후배 작가 가와카미 미에코와 네 차례에 걸쳐 한 인터뷰를 모은 책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가 번역 출간되었다. 문학동네 제공

하루키 소설에서 “여자가 여자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며 “남자의 자아실현이나 욕구 충족을 위해 희생”된다는 힐난성 질문에 하루키는 그런 것이 자신의 의도는 아니라면서 “‘미안합니다’라고 순순히 사과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겉보기에는 꼬리를 내리는 듯하지만, 사실은 핵심 쟁점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회피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분석이란 것을 썩 좋아하지 않”으며 자기 소설에 대한 비평을 읽지 않는다는 고백이 이런 태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알게 되는 것들은 이밖에도 적지 않다. 하루키는 세상 사람 대부분이 자기를 싫어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쓴 소설을 다시 읽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매년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데 기록은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 그리고 소설을 쓰지 않게 되면 재즈클럽을 열고 싶다는 꿈을 지니고 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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