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환의 세기, 유럽의 길을 묻다 -유럽연합 이후의 유럽
페리 앤더슨 지음, 안효상 옮김/길·4만원
유럽연합(EU)은 세계 경제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한 정치적 공동체로 미국, 중국과 함께 세계를 움직이는 3대 축이다. 하지만 지리적·역사적으로 가까이서 영향을 끼쳐온 미국, 중국과 비교하면 유럽연합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충분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유럽연합을 그런 무지의 어둠 속에 두어도 괜찮을 것일까?
페리 앤더슨은 1960년 세계 3대 진보저널로 꼽히는 <뉴 레프트 리뷰> 창간에 참여하고 20년간 편집자로 일해온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이자 사회정치평론가다. <상상된 공동체>를 쓴 인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의 동생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유럽통합의 역사와 이론, 주요국 상황 정리와 평가, 전망을 담아 쓴 <대전환의 세기, 유럽의 길을 묻다>(원제 ‘The New Old World’)의 국내 출간은 관련해 읽을거리를 찾아보기 힘들던 상황에서 반가운 소식이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유럽연합이 탄생하게 된 “절대적 기원”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는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필두로 한 보복 조치가 가해졌다. 여기에 반감을 가진 독일 국민이 히틀러를 지지하고 나섰고,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을 불러왔다. 양차 대전에서 교훈을 얻은 일군의 프랑스 테크노크라트들은 독일을 압박하는 것이 아닌 서로가 이득을 얻는 공동의 경제 질서를 만드는 방안을 구상했다. 그 결과 1952년 탄생한 것이 훗날 유럽연합으로 발전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였다.
‘유럽 통합의 아버지’로 불리는 장 모네(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1953년 룩셈부르크 벨발에 있는 제철소에서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출범 이후 첫 번째로 생산된 강철 주괴를 만지며 환하게 웃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초국가적 유럽’이라는 관점을 내놓고 실행한 소수 프랑스 테크노크라트의 핵심엔 장 모네라는 사람이 있었다. 부쿠레슈티, 상하이, 디트로이트 등 세계를 종횡하며 채권을 발행하고 대출을 해주는 국제사업가였던 그는 이탈리아인 부하의 아내와 사랑에 빠져 이혼이 가능한 모스크바에서 결혼한 다층적이고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은 모네는 그의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또 다른 갈등으로 이어지는 길을 막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앤더슨이 보기에 모네는 유럽공동체의 태생적 한계를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이다. 모네가 선거에 나서거나 유권자들을 만난 적이 없이 오직 정치인과 기업인 등 엘리트들을 상대로 한 협상을 통해 유럽공동체를 만들어갔던 것처럼, 유럽의 통일로 가는 운동엔 인민들의 참여가 없었다. “상황은 혁명적이지 않았으며, 유권자들은 엔진도 브레이크도 아니었다.”(프랑수아 뒤셴)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연합 기구들이 온통 선출되지 않은 관료들로 채워진 모습이 보여주듯, 유럽연합은 ‘인민의 의지와는 격리된 초국적 관료체제’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유럽연합에 소속된 국가들이 점점 늘어갈수록 “인민주권이라는 개념이 점점 더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 간다.
프랑스 시샤젤 지역의 로베르 쉬망의 집 앞에 세워진 <유럽의 창립자들에게 헌정함>이란 이름의 동상은 1951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출범의 핵심 인물인 (왼쪽부터) 알치데 데 가스페리 전 이탈리아 총리, 로베르 쉬망 전 프랑스 외무장관, 장 모네 전 유럽공동체 의장, 콘라드 아데나워 서독 초대 총리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그 결과, 1980년대 이후 유럽연합이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로 급속히 방향을 틀었을 때도 이에 제동을 거는 브레이크는 없었다. 6개국으로 시작한 유럽공동체는 현재 가입국이 28개국에 이르고, 미국을 넘어서는 국내총생산(GDP) 규모를 자랑하나, 미국에 대한 자발적 복종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앤더슨은 “유럽통합의 최종 결과는 초국가적 틀의 유사 행정부가 있는 관세동맹”일 뿐이라면서 “지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회사 가운데 하나”, “유럽연합은 이미 국가라기보다는 비자카드에 가깝다”(마크 레너드)는 말을 인용해 야유한다.
이와 함께 앤더슨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연합의 핵심국가들뿐 아니라 2004년 가입한 키프로스와 정회원 후보국이 된 터키를 통해 유럽연합이 확대되어가는 최근의 흐름을 보여준다. 특히 가장 넓은 영토와 가장 많은 인구 덕에 가입하면 주도적 위치로 올라설 가능성이 크고, 유럽연합에 중동 문제가 들어온다는 점을 구실로 터키의 가입을 탐탁지 않아 하는 유럽 국가들의 모순도 꼬집는다. 앤더슨은 “이 온건한 무슬림 나라의 유럽공동체 가입보다 다문화적인 관용의 빛나는 트로피가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며 터키의 가입 쪽에 힘을 실어준다.
지난 6월19일 독일 메세베르크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왼쪽)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오른쪽)이 유럽연합 장클로드 융커 유럽연합 집행위원장(가운데)를 환영하고 있다. 연합/AFP
현재 시점에서 이 책의 불가피한 한계는 2009년에 출간됐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최근 유럽연합 국가들에서 일어난 중요한 변화들이 담기지 못했다. 이 공백을 안효상 성공회대 외래교수(전 진보신당 공동대표)가 옮긴이의 말 ‘기로에 선 유럽(연합)'에서 일부 채웠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유럽에선 구제금융과 긴축정책에 분노한 민중의 지지로 일어난 그리스의 ‘시리자’와 스페인의 ‘포데모스’ 같은 진보 정치의 약진, 2010년 ‘아랍의 봄’에 이은 내전들이 낳은 대량 난민의 유입, ‘이슬람국가’(IS)의 테러와 유럽 내 극우 포퓰리즘의 성장, 2016년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결정 같은 큰 변동이 있었다. 이에 여러 대안도 제기됐다. 조지프 스티글리츠처럼 ‘유연한 유로(통화)’의 도입으로 유럽연합의 민주화가 가능하다는 노선, <뉴 레프트 리뷰>의 편집위원인 타리크 알리로 대표되는 좌파적 유럽연합 탈퇴를 주장하는 ‘렉시트’(Lexit) 노선, 유로존(유로화 통용국) 탈퇴에는 부정적인 대신 범유럽적 시민 불복종 운동을 벌이자는 그리스 시리자 정부의 전 재무장관 야니스 바루파키스의 노선 등이 그것이다.
앤더슨은 이 책에서 유럽연합이 유지 또는 해체 중 어느 쪽으로 가야 한다고 명확하게 주장하진 않는다. 그는 유럽연합을 강화하는 구심력과 해체하려는 원심력 중에 어떤 힘이 더 세질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이민자 유입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보수화되기도 했으나, 프랑스·독일·이탈리아·그리스 등지에서 노동자와 학생 들의 거센 시위가 일어나고 새로운 좌파정당이 힘을 얻고 있다는 점도 상기시킨다. “당분간 장기화된 경제침체가 과거에는 유럽 대륙에 자극제가 되었던 정치적 갈등과 이데올로기적 분열의 엔진을 재점화할지 모른다. 오늘날의 유럽에서는 어느 쪽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시간과 모순이 정지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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